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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Dec 11. 2022

영적인 세계로의 초대: trance

하루 한 절 성경묵상탐구(2) 사도행전 10장 10절

행 10:10
 (개역개정)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KJV) And he became very hungry, and would have eaten: but while they made ready, he fall into a trance,


등장인물: 베드로, 사람들 


앞 절의 맥락을 살펴보면,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고 한다. 이어지는 이 절에서 나타나는 내용은 지붕 위에 올라간 베드로가 배고픔을 느꼈고, 배고픔을 느껴 무언가를 먹고자 했다. 그리고 그를 위한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에 그는 황홀한 상태, 무아지경(trance)에 빠지게 된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어떻게 보자면 이 절을 다음에 나타날 상황을 위한 일련의 준비 상황으로, 그다지 중요하게 주목해야 하는 필요성을 주지 않는 것 같다. 특히나 한글 번역으로 읽었을 때 그랬다. 그래도 이 절에서 무언가를 묵상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킹제임스 번역으로 한 자 한자 씹어 나갔을 때 보이는 게 있었다. 


우선,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상태'가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상태는 육체의 배고픔이다. 육체의 필요는 뇌에 전달되어, 정신이 먹기를 원하는 두 번째 상태로 이행한다. 그리고 외부에서 그를 위한 음식이 준비되고 있을 때, 세 번째 상태인 '황홀함'(킹제임스 한글 번역에서는 '무의식'중 이라고 번역되었다)으로 빠져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상태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으로 너무도 당연하지만, 세 번째 상태는 초월적으로 보인다. 


우선 'trance'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한국말로는 '황홀함, 무아지경'으로 번역된다. 

 무아지경(境): 정신이 한 곳으로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

'자기 자신을 잊는' 정도로 다른 땅,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지경'으로 이동한 것이다. 


헬라어 원어로는 '엑스타시스'로 '마음의 변화, 당황, 황홀, 경악'등으로 제시되어 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놀랐다'의 의미인 amazed, astonishment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사도행전에서 이 10장 이후로는 10장 10절과 같은 의미인 '황홀함(trance)'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 세 번째의 상태를 '영적'인 상태로 바뀐 것이라고 느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 이 단어가 사용되는 성경 구절들에서의 '놀란 상태'는 모두 이 세상의 논리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이적들이 행해지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었던 소녀가 일어나서 걷고(막5:42),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막16:8) , 앉은뱅이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며(눅5:25), 장님이 눈을 뜬(행3:10) 일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본 무리들의 '놀람'이 바로 이 '엑스타시스'로 사용되었다. 이 사건들은 분명하게 영적인 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고, 그것을 목격한 무리들에게 다른 것으로 놀라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영적인 떨림을 주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단어가 구별된 것이라고 본다.



두 번째로, 이 다음 절에서 분명히 이 '황홀한 지경'에 들어간 베드로의 환상이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이 절의 내용을 넘어가는 묵상이기는 하지만 간략히 언급하자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는 그 환상의 일이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바꾸신 변화이며 이제 그것을 베드로가 사는 땅, 가시적인 세계에서도 변화시키실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절을 통해 분명하게 구별되는 이 세 가지 상태, 특히 세 번째의 '영적인 상태'를 묵상해보았을 때 오늘 나에게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로의 초대를 하고 계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로는 영적인 세계를 종종 생각하지만 그것은 육체와 정신의 여러 가지 필요와 변화에 맞물려 쉽게 멀어지며 잊어버리는 세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여기서 많은 이적들을 본 사람들이 그랬듯, 베드로가 그랬듯 그 문은 내 자신이 직접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문이 열려야 내가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지경'이기도 하다. 마치 구원의 일처럼 말이다. 나는 오랜 시간 육체와 정신의 지경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번 년도 6개월간 영국과 폴란드에 있으면서 영적인 세계의 어렴풋한 공기를 경험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그곳으로 초대하신다는 것도.


그리고 다시 이 절에서 육체의 배고픔을 느낀 베드로에게 영적 세계에서 비유적으로 음식을 나타내신 '짐승들'을 생각해보았을 때, 영적인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갈망은 늘 육체와 정신의 세계와 갈망을 매개(mediate)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육체와 정신의 소망은,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영적인 세계에서 이루고자 하는 소망에 깊이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소망하는가? 그것은 한 끼의 식사를 함으로서 해결되는 소망인가? 그것은 혹, 당신의 깊은 심연에까지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초대하시는 그 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무엇은 아닐까. 



2022.12.11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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