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우정, 에로스 그리고 자비
빅토르 위고의 대작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 >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더 나은 사회를 꿈꾸었지만 여전히 지독한 가난과 부조리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Les Misérables은 프랑스어로 '비참한(혹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제목 그대로 비참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사람들의 모습이 더 이상 비참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처지는 달라진 게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의 삶이 가난에서 풍요로, 죽음에서 삶으로 변한 것이 아닌데도요. 그런데도 장발장이 위대해 보이는 것은, 혁명군들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왜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장발장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보여준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우리에게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이며 영문학자,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의 저서 <네 가지 사랑 The Four Loves>은 사랑의 네 가지 모습에 대해 설명합니다.
각각의 사랑은 곧 애정(affection), 우정(friendship), 에로스(Eros), 그리고 자비(charity)의 사랑입니다.
루이스는 애정과 우정, 에로스가 인간의 자연적 사랑임에 반해 자비의 사랑은 신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앞의 세 가지 사랑은 우리에게 친숙한 데 비해, 자비의 사랑은 높은 경지에 있는 듯 보입니다.
저는 루이스가 소개한 네 가지 사랑으로 <레 미제라블> 주인공들에게서 나타나는 사랑과 스토리를 조금 더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각각의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랑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스토르게(storge)라는 헬라어 단어는 '애정, 특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부모에 대한 자식의 애정 또한 이에 해당됩니다. 루이스는 애정은 '필요의 사랑(Need love)'과 '선물의 사랑(Gift love)'이 모두 공존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필요의 사랑은 자식이 날 때부터 부모를 필요로 하면서 그에게 형성되는 애정이고 선물의 사랑은 부모가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선물을 주듯 자식을 기르고 돌보며 형성되는 애정입니다.
추운 겨울날 맨발로 혼자 물을 길으러 가야 했던 코제트.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신발도 없이 홀대받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부모의 사랑과 보호입니다. 그때 코제트 앞에 나타난 장발장. 그는 코제트에게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선물의 사랑을 줄 것이라 다짐합니다.
애정은 장발장과 코제트 사이를 강하게 묶어 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코제트에게 향한 장발장의 사랑만은 아닙니다. 코제트에게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그 순간부터 장발장은 다시 한번 삶을 이어나갈 의지를 얻게 됩니다. 장발장은 죽어가는 판틴과의 약속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코제트를 지키겠다'는 사명을 갖게 됩니다. 자신을 체포하려는 자베르 형사를 눈앞에 두고도 목숨을 걸고 강가에 뛰어들어 코제트를 찾으러 갑니다. 만약 이러한 약속이 없었다면 장발장은 자베르에게 순순히 잡혀 갔을 것입니다. 영화에서 코제트를 데리고 도망하는 장발장은 이런 노래를 부르죠.
Nevermore alone,
다시는 혼자가 되지도
Nevermore apart,
(우리가) 헤어지지도 않을 거야
You have warmed my heart like the sun.
넌 태양처럼 내 마음을 뜨겁게 했지
You have brought the gift of life.
넌 내게 삶의 선물과
And love so long denied me
한때 날 거부하였던 사랑을 주었지
-Hugh Jackman- Suddenly 중-
루이스는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선물의 사랑'이지만 선물의 사랑도 사랑받는 대상의 필요를 요하는 '필요의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무조건적으로 제공하는 듯 보였던 선물의 사랑도, 그 사랑을 받는 이의 필요가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애정의 묘한 역설이 있게 됩니다. 장발장은 코제트를 맡으면서 전과자로 낙인찍힌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지 않기 시작합니다. 쫓기게 되더라도 적극적으로 삶을 이어나가려는 노력을 하게 되죠. 코제트는 필요의 사랑을 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장발장에게 선물의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루이스는 애정이 양면성의 위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애정의 사랑은 오래되고 친숙한 것에 의지하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애정을 무기 삼아 서로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 변할 때 질투나 배신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발장은 코제트가 마리우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분신과도 같던 코제트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나이 들었고 코제트는 성숙해졌죠. 코제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맨발의 꼬마가 아니라,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관계에서 변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장발장이 이 애정을 지키고 싶어 마리우스를 모른척했다면, 우리가 아는 결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애정이 불러일으키는 질투심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형태의, 더 높은 차원의 사랑으로 코제트와 마리우스 둘을 감싸 안게 됩니다.
<레 미제라블>의 배경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입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대혁명 이후 26년 후'라고 그 배경을 명확히 밝히고 있죠. 이는 1832년에 일어났던 6월 혁명(June Rebellion)을 배경으로 합니다. 데이비드 벨로스의 <세기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는 빅토르 위고가 소설의 배경으로 6월 혁명을 택한 이유는 오히려 많은 사상자만을 남긴 채 실패로 끝난 혁명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혁명이 대혁명과 다르게 오히려 실상에 가까웠기 때문일까요. 마리우스와 같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던 6월 혁명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 주목도 받지 못했지만 크고 작은 시민혁명들이 이후에도 꾸준히 일어났었고, 이 혁명들 덕분에 프랑스는 민주공화국으로의 전진을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우스와 그의 친구들, 시민혁명 군단 사이에서 두 번째 사랑인 '우정'을 볼 수 있습니다. 루이스에 따르면 다른 종류의 사랑과는 달리 우리는 우정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우정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관계의 사랑입니다. 애정이 정말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반면 우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정이 가능하려면 같은 관심사나 공유하고 있는 문제 등 사람들을 이어 줄 수 있는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루이스에 따르면 우정의 사랑에서 사랑한다는 의미는 '우리는 같은 진리를 보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우정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레 미제라블>에서 단지 가난한 사람들만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부호 집안 출신인 마리우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그들을 이어 주는 것은 그들이 보고 있는 같은 '옳음'입니다. 부호 집안의 마리우스와 어리고 대담한 가브로쉬까지 각양각색의 혁명군들은 하나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바로 부조리한 현실을 바라보고 그 현실을 함께 바꾸어나가자는 진리입니다.
'Can you hear the people sing'이라는 ost를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목소리로 하나의 진리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마 '사랑'이라고 하면 가장 직관적으로 떠올려질 수 있는 형태가 바로 이 '에로스'의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레 미제라블>에서도 누가 누구에게 에로스의 화살을 향하고 있는지 명백히 보입니다. 바로 코제트와 마리우스입니다. 애정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우정이 특정한 몇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랑이라면 에로스는 연인 단 두 사람만의 사적인 private 사랑입니다.
루이스는 에로스와 성적인 욕망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성적 욕망은 성 자체에 대한 개인의 욕망이지만 에로스는 특정한 연인 그 사람 자신을 원하는 사랑입니다. 물론 에로스에도 성적 욕망이 깃들 수 있지만 에로스는 성적 욕망 그 자체는 아닙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오히려 특정한 한 사람에게 즐거워하고 몰두하느라 성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랑입니다.
코제트와 마리우스 두 남녀가 '서로가 아니면 안 될' 경지의 에로스적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차마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마리우스 주위를 빙빙 도는 여인, 에포닌이 있습니다. 마리우스에 대한 에포닌의 사랑도 분명 에로스입니다. 그리고 에포닌의 사랑도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서로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열정적이고 강렬한 사랑입니다. 셋 다 자신이 원하는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심각한 삼각관계입니다. 사랑에 빠지기 전 코제트는 아버지 장발장밖에 몰랐을 것이고, 마리우스는 혁명 생각에 늘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영화에서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원작에서 에포닌은 아버지 떼나르디에의 사기 행각을 도우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셋은 이전에 에로스적 사랑에 몰두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게 특별한 한 사람이 된 서로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에로스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코제트보다 에포닌의 사랑이 조금 더 강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코제트는 당장 프랑스를 떠나자는 아버지 장발장의 말에 마리우스를 떠나는 것이 슬프지만 이내 순종합니다. 그러나 에포닌은 코제트를 놓치고 슬퍼하는 마리우스를 보고 함께 마음 아파하며, 죽음이 턱끝까지 다가온 결정적 순간 자신의 사랑을 숭고한 희생으로 변모시킵니다. 에포닌의 행동은 어쩌면 에로스 그 자체가 이를 수 있는 최상에 이른 듯 보이기도 하지만, 에로스를 뛰어넘은 신적인 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제,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 중 마지막 사랑인 '자비'에 이르렀습니다. 루이스는 앞서 설명한 사랑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자연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적 사랑이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인간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사랑이라면, 자비는 그와 대비되는 '신적인 사랑'입니다. 자비는 무한한 존재이며 사랑 그 자체인 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선물의 사랑'의 역설을 보았습니다. 인간적 선물의 사랑은 대상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 필요가 자신에게 있거나, 대상에게 베풀며 그 자신이 즐거워하는 등 자신의 유익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신적 사랑은 어떠한 사심도 없이 대상 자체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자비의 사랑은 미리엘 신부에게서 드러납니다. 그는 장발장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거부한 장발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도둑으로 잡혀 들어와 나가는 순간까지 말입니다. 신부의 그 모습은, 이를테면 자기의 유익이나 안전을 구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자신이 유일하게 가진 귀중한 재산까지 내어주는 그의 사랑은 신적 사랑입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런 종류의 사랑은 결코 인간 스스로가 구현할 수 없으며 완전한 존재인 신으로부터, 그가 베푸는 사랑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종류의 사랑이 신적 사랑인지 조금 더 살펴볼까요? 루이스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 명석함, 유용함 등으로 사랑받기를 원하지, 우리 자신에 대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느냐고요? 그것은 그 사람에게 우리가 사랑스러운 무언가, 우리가 사랑하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류의 사랑도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습니다. 오히려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랑을 상상하기가 더 힘듭니다. 그러나 신이 사랑 그 자체라면, 사랑의 이유를 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미리엘 신부가 보여 준 자비의 사랑은 장발장을 증오와 탄식으로 가득 찬 전과자에서 자신과 같이 자비를 베풀며 기꺼이 자기를 내어 주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장발장은 자신을 캄캄한 감옥으로 집어넣으려 혈안이 되어 있던 자베르 형사를 없앨 수 있는 기회에도 그를 살려 보냅니다. 자베르만 사라진다면 장발장도 자신의 어두운 과거의 그림자를 떨쳐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베르는 그의 인생에서 결코 사랑하거나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장발장이 미리엘 신부를 통해 경험했던 자비의 사랑은 무언가 달랐습니다. 장발장은 자베르에게 일관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미리엘 신부가 자신에게 그랬듯 말이죠.
장발장은 쫓던 자베르는 죽어 가는 마리우스를 둘러업고 힘겹게 도망하는 장발장을 보고 무언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어 왔던 정의와 법들이, 신념들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것이었기도 해서 그는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만도 못한 존재를 통해 신적 사랑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가 믿는 대로라면 장발장은 자신의 목숨을 진즉 빼앗고도 남아야 했으니까요.
신적 사랑은 인간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발장은 미리엘 신부의 사랑과 용서로 눈부신 인간이 되었습니다. 에포닌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자베르는 자신의 믿음이 무너진 세계를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6월 혁명의 많은 혁명군인들이 있습니다. 영화의 많은 사람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비참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믿음을 위해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감독도 이처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영화의 말미에서 그들은 자유롭고 힘차게 노래를 부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