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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Mar 03. 2022

떠나고 싶지 않아서 떠나기로 했다

또 한번의 여행길에 오르는 이유

대학원 휴학을 결정하고 다른 나라로 가서 약 6개월간 체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2주도 안 된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초대를 받고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고, 잠시 후 '음, 정말 가도 괜찮겠네' 라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사실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다고 봐도 되리라. 내가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결정할 때, 특히 어딘가로 '갈 때는'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는 가볍고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나에게는 확실함의 지표가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가야겠다'는 결정에 더 불씨를 지핀 것은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계속 여기서의 삶을 지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도 20대 초중반 때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20대 끝에 서 있는 지금의 나는 나 자신의 즉흥성과 방랑벽을 되돌아보며 가지 못할 이유도 고려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확실히 나이가 들었는지 이곳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도 슬몃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또 어딘가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내려놓고 감수해야만 하는 것들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너무나 귀찮게 느껴졌다. 막상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일인 것들이다. 말하자면 관성을 깨는 일이 나이가 들수록 더 버거워지는 것 같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귀찮아서 갈지 말지를 고민한다는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나에게 충격적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이것이 나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을 찾아가는 것인가 싶으면서도 나이들고 있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관성 때문이라면, 아직은 깰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으니. 앞으로 5년, 10년 뒤면 지금보다 더 체력이 약해지고 편한 것과 익숙한 것을 바랄 것이다. 그때쯤이면 내 삶에 더 깊게 뿌리박은 것들이 생길 테고, 나는 그것들과 타협해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더 걸어보고 싶다. 불확실과 미지의 시간 속으로. 




지금의 안정된 생활이라고 해 봐야 사실 별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꽤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다. 이곳에는 내가 당분간 지낼 수 있는 집도 있고, 학교도 있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일자리도 있다. 가족과 친구는 물론이고, 함께 일과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먹는 것, 입는 것, 운동하는 것 모두 내 나라에서 내 몸에 착 달라붙은 편안함이다. 지금 떠난다면, 이 모든 것은 잠시 뒤로해야 한다. 그중에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6개월은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가지 일들이 변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내가 떠나는 이유도 6개월이라는 시간 안에 삶의 긍정적인 변화와 만남들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의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누렸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자주 지금의 삶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특별했고 감사한 만남들이 있었다. 조용하고 흐린 날들도 있었지만 그 날들도 나의 일부임을 느낀다. 떠나는 것의 진짜 이로운 점은 이전의 일상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서가 아니다. 오히려 떠나왔던 곳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데 있다. 멀어질수록 내가 입고 먹고 만나던 것들의 진짜 가치들을 하나하나 깨닫게 된다.


지금의 내 삶이 돈도 없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으며 학문에서의 생산성도 없다고 느낀 적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내려놓을 것이 그닥 많지 않아서 떠날 수 있는 것 같다. 또 이번 학기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내가 휴학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간다고 한다. 그 분에게는 좋은 일이다. 물론 나에게도 내가 포기한 시간과 돈보다 더 좋은 날들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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