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라는 위치의 특수성
나에게 시댁이 생긴 건 2015년 봄이다. 우리는 그해 가을에 결혼을 했는데 왜 시댁은 봄에 생겼을까. 시할머니와 함께 살고 계시던 시부모님은 서울에 오셔서 처음 만나 뵙고 친척들과 할머님께 인사드리러 내려갔다가 그 길로 그냥 그 대가족에 일원이 되어버렸다. 어떠한 절차나 순서, 시간 상관없이 한 번에 말이다. 대가족 밴드며, 단체카톡방이며, 정신없이 초대를 받았고 정신 차려보니 이미 “ㅎㅎ”를 남발하며 답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불편감이 조금씩 올라왔다. “스스럼없이 식구처럼 대해주면 좋지 뭘 그래.”라는 선배의 말을 들었다.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예민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탓일까. 그 불편감이 모두 다 내 탓 같았다. 그들은 나를 불편하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닌데 불편하게 느끼는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고 나도 나를 그렇게 대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불편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비상식적인 상황에서조차도 남편은 나의 충분한 방패막이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허허벌판에 서서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맞으며 홀로 견뎌야 했고 그런 나를 탓하기까지 했다. 그때 느꼈다. 감옥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내가 한 선택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했고 불편한 시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밀어붙이면서까지 무던히 노력했다. 그 노력조차도 철저히 혼자였으며 처절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노력은 모두 헛수고였으며 상처에 고름만 남겼을 뿐 십 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볼 때 모든 것을 견디며 시간에 맡기는 동안 내 안에 상처는 눈덩이 불어나듯 불어났고 시댁과의 관계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요즘 인생 대부분의 문제들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생각하며 지내지만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 또한 ‘분명‘ 있다는 것을 시댁을 통해 깨달았다.
그들이 준 상처는 그들 입장에서 보면 상처가 아닐 수도 있다. 특히 시어머니는 며느리로서의 자신과 나를 동일시했다. 자신은 열아홉 살부터 이 집안에 와서 식당일을 돕고 밭일도 도우며 딸이 없는 집안에 딸 노릇을 하며 지냈던 것을 무의식적으로 나에게도 당연하게 요구했고 대물림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아닌 것을 어쩌겠는가. 나는 순진한 열아홉도 아니고 본인의 시아버지(나에겐 시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나의 시아버지인 것부터가 동일시의 오류 아닌가.
결혼식 하기 전부터 직장 생활하는 것과 상관없이 주말마다 편도 400km가 넘는 거리를 오라 가라 하는 뻔뻔함과 싸워야 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위치와 역할인 며느리라는 특수성 때문일까.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아주 조금은 나아졌지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거나 바로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내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일까 아니면 며느리라는 자리가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아직도 헷갈린다. 그래도 지난여름을 기점으로 나는 시댁에서 내 색깔을 잃지 않고 행동하려고 하는 중이다. 그게 못된 며느리, 싹수없는 며느리의 모습일지라도 나에게는 잃어버린 십 년이 있기에 간절하다. 며느리라는 역할이 나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나의 전부를 삼켜버릴 수 없음을 단단히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