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글방 2 장소묘사: 책방
진눈깨비가 내리는 퇴근길. 버스에서 내린 수진은 가방에 있는 우산을 쓰지 않고 걸어갔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몇 달 전 알게 된 책방으로 향했다. 파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파란색 간판부터 파랑 계열의 책 표지들, 크고 작은 파란색 바구니들, 카페지기의 파란 컵과 파란 컵받침까지 사방이 파랑으로 가득한 책방이 조금은 기괴했다. 그러나 먼지처럼 떠다니는 수진의 마음은 책방에 머물수록 심해저로 가라앉는 듯한 안정감이 들었다. 수진은 허공에 떠 있는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을 때면 파랑으로 둘러싸인 안정감을 찾아 책방에 갔다.
딸랑. 안녕하세요.
무심한 듯한 책방지기의 건조함은 수진이 책을 사지 않고도 심해저의 안정감을 향유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카운터에 놓여있는 팸플릿의 문구가 수진의 눈에 들어왔다.
제주대학교 지구해양과학과 김명철 교수 연구실 세미나.
책방에서 지구해양과학과 세미나라니. 수진은 궁금했다.
여기서 랩실 세미나도 하나 봐요.
네. 공간대여도 하고 있어서요.
수진은 십 년 전 그 일을 생각할 때면 여전히 목에 큰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지도교수였던 채영은 성적이 좋았던 수진에게 석박통합과정을 추천했고 수진은 그런 채영이 좋아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학부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숨 막히는 랩실 생활에 수진은 번아웃이 찾아왔고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힘이 닿는다면 수진은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려놓고 싶었다. 어쩌면 스물세 살에 늦은 사춘기가 세게 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스물세 살의 수진은 당장 멈출 수 있는 것을 멈추는 것, 멈출 수 없다면 도망치는 것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은 번아웃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수진은 그렇게 석박통합과정을 포기하기로 하고 채영의 방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고 다짜고짜 눈물을 흘리는 수진에게 채영은 휴지를 건넸다.
교수님, 저 대학원 못 갈 것 같아요.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수진은 졸업이라는 마침표를 대충 찍어버리고 도망쳤다. 그렇게 도망친 세상에서 만난 남자와 7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혼했고 그렇게 또 도망치듯 제주로 내려왔다. 2년이 지났다. 수진은 크기도 작고 두께도 얇은 파란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책방에서 새 책들의 책장을 넘길 때면 안정감이 들었다. 책들이 뿜어내는 각각의 수줍음과 속삭임을 느끼며 책들을 고르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수진의 눈에 들어왔다.
도망자의 방명록.
또다시 수진은 목에 큰 생선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딸랑. 책방 문에 달린 종이 또 울렸다. 수진은 책을 고르다 말고 돌아보았다. 둘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눈을 마주친 채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파랑으로 가득 찬 심해저에서 수진의 목에 걸린 생선 가시는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묵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