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박약, 게으름뱅이에서 벗어나다.

퇴사자의 일상 회복기

by 그레이스

워낙 부지런한 타입이 아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다.

엄마는 내게 끈기가 없다고 했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상 게으름뱅이에 끈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정의 내렸다.


그럼에도 회사를 다니면서 늘 하고 싶은 것 많았다. 매일 플래너에 빼곡히, 온갖 생산적인 계획을 쓰고 지키겠다는 호언장담을 하고 다음날 포기했다. (이것이 18년 간 반복되었다!)

그리고는 '나는 원래 게을러. 끈기도 없지. 원래 이런 걸 어쩌겠어'라고

포기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쭉 계획만 세우는 게으름뱅이로 살았다.



퇴사 후 나의 일상은 회사 생활과 만만치 않게 바쁘다. 분주하게 아침을 챙기고 아이와 남편이 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시간이 시작된다. 나는 이 시간에 조금이라도 빨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어서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집안일을 한다. (어지러운 집에선 평화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온 집안을 쭉 돌면서 아주 일사불란하게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고 오며 가며 미리 켜놓은 커피 머신으로 재빨리 커피를 내리고 책상 앞에 앉는다. 앉자마자 하루 일과를 기록하는 플래너를 펼치고 읽던 책을 꺼낸다. 오전 내내 이렇게 읽고 쓰기를 반복한다.

여기까지 게으름뱅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하루가 허투루 지나가는 것이 아까워서 시간 단위로 계획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 나는 천상 게으름뱅이가 아니었다.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 씌운 '의지박약 게으름뱅이'의 프레임에서 벗어났다.

나는 단지 여러 곳에 에너지를 분산하지 못하는 사람일 뿐 게으름뱅이나

의지박약이 아니다.


활발한 에너지를 여기저기 분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퇴근 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는, 뭔가를 계속 이뤄내는 에너지가 넘치는 부류.

나는 그런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런 사람들을 끊임없이 부러워했다.

그렇지 못한 나를 못났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런 나를 진작에 인정할 걸 그랬다.

회사 생활을 충실히 하고 집에 돌아오면 쉬어야 하는 나를 그대로 인정해 줄 걸.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줄 걸.

그랬더라면 애초부터 지키지 못할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매일을 죄책감과 후회로 보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지금 나의 목적은 '덕업 일치'하나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그 하나의 목적 앞에서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무궁무진하다.

사실 그 일들은 아주 작고 사소하다. 하루 종일 밥도, 돈도 안 나오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꼼지락거리며 플래너에 스티커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주변의 눈에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일들이 더 이상 나를 게으르지 않게 만들고 에너지를 쓰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남들처럼 회사 끝나고 '건설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고 자책하지 말자.

대신 작고 작은 내 에너지를 기꺼이 쏟을 수 있는 일을 딱 하나만 찾아보자.


내가 좋아하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것.

그것이 내 일상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막아 주고 갑작스레 찾아오는 번아웃을 막아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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