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한 영어 공부

퇴사자의 일상 회복기

by 그레이스

올 초에 가족들과 호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속 편하게, 해외로밍 없이 다녀온 여행이라 그런지 패키지여행의 고된 일정도 마냥 좋기만 했다.

한식보다 양식을 좋아하는 식성이라 스테이크나 피시 앤 칩스 같은 식사도 잘 맞았고 실제로 본 코알라는 고 느릿한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무튼 하루에 만보가 넘게 걸으면서도 아이보다 더 신바람이 났다.

딱 하나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어였다.



호주 공항에서 검색대를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알고 보니 몇 분에 한 명씩, 무작위로 뽑아 추가로 짐 검사를 하는데 내 순서에 딱 걸렸던 것. 별일 아님에도 순간 얼음이 되었다. 짐을 검사하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만 맴돌다 입 밖으로 나오질 않으니 어찌나 속이 터지던지.. 먼저 나가던 남편을 불러 해결하는데 괜히 속이 상했다. 여행 중 식사를 주문하거나 커피를 살 때도 머릿속으로 '이게 맞나?' 하며 소심해졌고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는 나 자신이 참 답답했다. (아이가 옆에 있어 당당한 체했지만 말이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의 새해 계획 1번은 늘 '영어 능통자'되기였는데..

현실은 영어 능통자는 커녕 왕초보와 초보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다니. 그것도 20년 동안 말이다. 좀 민망한 일이지만 나는 호주 여행 이후 버킷 리스트에 '영어'를 다시 넣었다.




사실 이제 여행을 다닐 때 굳이 영어를 잘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훌륭한 번역 앱들이 있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번역기를 써서 소통하면 된다. 이런 세상에서 마흔이 넘어 아직도 영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어리석은 일인가도 싶다.

20년간 안 됐으면 안 된 거지. 그냥 포기하면 편하지 않을까. (실은 올 초 연간 계획을 세울 때도 이런 생각에 영어 공부는 접어두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번역기에 하고 싶은 말을 쓰는 소통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자유롭게 말하는 내 모습인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일은 인생에서 자유의 영토를
넓히는 과정이다.

김익한, 거인의 노트 89p



그렇다.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되면 나는 자유로워진다. 잘하지 못했던 영어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된다면 그 이후의 여행이 얼마나 더 즐거워 질까.


비단 영어뿐만이 아니다. 극한의 운동치와 방향치, 소심한 성격을 탓하며 배우기를 미뤄온 자전거, 운전같이 나에게 자유를 선사할 드넓은 미지의 영토가 내 앞에 펼쳐져 있다.


퇴사로 인해 내게 주어진 시간의 여유와 방해요소 없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 그리고 나이가 들어 생긴 특유의 꾸준함을 '자유의 영토를 넓히는 일'에 써야겠다.


영어를 공부하고 다음은 한강에 자전거를 가지고 나가보고 그다음엔 운전도 해보면 어떨까.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는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각을 바꿔보니 나에게 자유를 선사해 줄 '배울 일들'이 되었다.




밤 9시 40분.

고즈넉한 밤의 시간, 나는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구입한) 초보 영어책을 펼치고 책상 앞에 앉는다. 머릿속으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하는 나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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