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 김지하 -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김지하 시인의 ‘새봄’은 중1 교과서에 실렸었다. 시인은 벚꽃의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 푸른 솔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벚꽃의 변덕이 있으므로 푸른 솔의 변함 없음도 드러나는 것임을 깨닫고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하게 되었다고 노래한다. 짧은 시지만, 깊은 철학을 담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 시의 깊은 뜻을 더 이해하게 된다.
푸른 솔은 상록수로 변함없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어떤 어려움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신념을 지키는 인물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그렇기에 푸른 솔이 칭송받는 것이지만, 사시사철 모습이 바뀐다고 벚나무를 나쁜 나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봄에는 화사한 꽃을 피워 가장 봄답고, 여름에는 초록 잎이 싱그러워 가장 여름답고, 가을에는 낙엽이 져서 가장 가을답고,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가장 겨울나무다운 나무가 벚나무이다. 이렇게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벚나무의 매력일 것이다. 그러므로 ‘푸른 솔은 좋고, 벚꽃은 나쁘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지난달 지인들과 밀양으로 산행을 다녀오는 길에 케이블카를 타게 되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10분 정도 올라가니 해발 1000m가 넘는 정상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상 부근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웅장하고 멋있었다. 그러나 한편 편하게 앉아서 10분 만에 도착한 정상이라 매우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수 시간을 고생하며 올라와서 경치를 내려다보았다면 감격해서 눈물이 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편히 정상까지 오르니 정상에서 맛볼 수 있는 감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상 부근에 케이블카를 만드는 것은 등산의 감격을 빼앗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어째서 인간들은 이런 류의 기계를 만드는가 생각하며 문명의 이기를 비판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데 문득 엄마와 이 케이블카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좋아하시지만, 이제 칠순이 되신 엄마께서 도보로 해발 1000m 정상에 오르시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다면 엄마도 정상의 풍경을 감상하실 수 있다. 또 몸이 불편하신 분들도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해발 1000m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케이블카는 얼마나 고마운 문명의 이기인가?
세상의 많은 일도 그렇지 않을까? 자신의 관점에서만 판단해서 이것은 좋은 것, 저것은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분법으로 세상을 판단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겠다.
벚꽃도 푸른 솔도 다 존재의 이유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