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힘]

by 그레이스


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소나기. 황순원-

소설 ‘소나기’는 중1 2학기 첫 단원에 수록되어 있어서 해마다 9월이면 소나기를 낭독했다.

(10여 년 동안 ‘소나기’ 수업했으니 50번 이상은 낭독하지 않았을까)

수업 전 아이들에게 ‘소나기’에 대해 브리핑을 한다.

“시처럼 예쁜 문체의 소설이야. 아름다운 가을에 잘 어울리는 소설이지. 주인공 소녀는 단발머리에 분홍스웨터와 남색 스커트를 입고 다녀. 뽀얀 피부에 단발머리. 분홍스웨터에 남색 스커트. 소나기 패션이야. 너희들도 한번 따라 해 봐. 그런데 제목이 왜 소나기일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읽으면서 생각해 봐. ‘소나기’는 나도 중학교 때 배웠고 너희 부모님들도 학교에서 배우신 소설이야. 세대를 이어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우리나라에서 황순원의 ‘소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렇게 수업을 시작하면 아이들이 안 듣는 척하면서도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다. 간결체로 된 ‘소나기’의 문장은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낭독해야 제맛이 난다. 나는 낭독하고 아이들은 듣고. 낭독 사이 사이 시험에 나오는 것 필기해라 잔소리하기도 하지만, 소설 수업은 낭독과 듣기가 주를 이룬다. 학교 수업 마치고 뛰어놀아야 할 오후 시간에 학원에 갇혀 있으니 수업이 재밌을 리 없지만, 그래도 소설 수업할 때는 대체로 딴짓 안 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간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보다 정신적 성장이 조금 느려서 중학생이 되어도 어리기만 한데, 그 남학생들도 결말 부분에 이르면 사뭇 진지해진다. 소녀가 죽어요? 매우 슬프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숙연해지고 결말이 주는 여운에 잠긴다. 아무 생각 없이 장난만 치는 것 같아 보이던 아이들도 감상에 잠기는 모습을 보며 문학의 힘을 생각한다.


문학의 힘을 깨닫게 해 준 또 다른 작품은 ‘학마을 사람들’이다.

저녁때가 거의 다 되어서야 그들은 산을 내려왔다. 이번엔 덕이가 맨 앞에 두 주의 위패를 모시고 걸었고, 그 바로 뒤를 봉네가 흰 보자기를 뿌리로 싼 조그만한 애송 나무를 하나 어린애처럼 앞에 안고 따르고 있었다. - 학마을 사람들. 이범선 -



‘학마을 사람들’은 중2 교과서에 실렸었다.

“학이 똥을….”

학이 물동이에 똥을 떨어뜨리면 시집을 가게 된다고 했다. 나도 중2 때 이 소설을 배우며 친구들과 학의 똥 이야기를 하던 기억이 난다. 재미도 있었고 뭐라 설명할 수 없었던 감동도 있었던 작품이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학마을 사람들’은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국어 수업이 마지막 시간이면 아이들은 수업을 마치기 전부터 가방을 다 정리하고 종이 울리자마자 달려갈 준비를 한다. 그날은 국어 수업이 마지막 시간이었고 ‘학마을 사람들’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탕!탕!탕! 바우가 쏜 총에 학이 죽었다. 학마을 사람들에게 학은 마을의 길흉을 알리는 신과 같은 존재이며, 깊은 애정의 대상이었다. 그 학이 바우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교실에는 긴장된 침묵이 흘렸고, 아이들은 바스락 소리하나 내지 않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나는 큰 소리로 절정과 결말 부분을 읽어 나갔다. 시공을 초월한 것 같은 밤공기가 우리를 학마을로 데려다 놓았다. 결말을 미처 다 읽기 전 종이 쳤지만,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빠르게 결말 부분을 읽고 ‘애송나무’의 상징적 의미를 설명했다. 학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힘이 된 ‘애송나무’가 아이들의 마음에도 안도와 희망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애송나무’가 있으니까 괜찮아. 다시 학이 찾아올 거야.‘

아무도 늦게 마친 것에 불평하지 않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교실을 떠났다.

’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이 있구나. 문학은 아이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구나.‘

문학은 위대한 것이 확실했다.

‘기억 속의 들꽃’ ‘운수 좋은 날’, ‘사랑 손님과 어머니’,‘원미동 사람들’...

아이들과 함께 한 추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작품들. 이 작품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감동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공부가 아닌 문학 그 자체로 접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래도 국어 시간에 읽은 소설들이 아이들을 자라게 했을 것이다. 문학은 힘이 있었고, 나는 아이들의 얼굴에 어리는 그 힘을 보았다.


사실 ‘시’도 엄청난 힘이 있지만, 아이들은 ‘시’는 잘 감상하지 못했다. 국어책에 나오는 ‘시’는 문학이 아니라 ‘공부’라 여기는 것 같았다. 시를 왜 배우냐 묻는 아이들에게 나는 말하곤 했다.

“너희들 크면 시집 사서 읽을 것 같니?”

“아니요. 절대 안 읽을 건데요. 시를 왜 읽어요.”

“그러면 지금 학교 다닐 때 시 외워야 해. 지금 배우는 시가 너희가 평생 아는 시의 전부가 될 거야. 사람이 그래도 70, 80년을 사는 데 시 하나도 모르면 되겠니? 시 몇 개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그리고 누가 너희들에게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묻거든 윤동주 시인이라고 말해.”

“왜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거든.”

“아…. 싫은데요.”

“그럼 너희들 좋아하는 시인 있어?”

“없는데요.”

“그러니까 제일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 시인하라고. 그럼 엄청 멋있어 보여.”

아이들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윤동주 시인의 이름을 기억했다.


미디어 어항 속에 사는 물고기처럼 넘쳐나는 영상과 SNS에 둘러싸여 사는 아이들이 문학의 바다에 빠질 수 있으면 좋겠다. 문학은 힘이 있고, 아이들도 문학을 좋아한다. 아이들과 함께 문학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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