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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는 사람 K

결혼기념일이다. 좋건 싫건 사적 관계를 올해로 8년째 유지하고 있다. 3월에 태어났지만 나는 봄을 덜 좋아한다. 내가 감당하기 벅찰 만큼 화려하고 생기 넘치기 때문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월에 내 삶에 중요한 이벤트가 있었으면 했고, 운 좋게 10월 29일 부부가 됐다.


가파른 언덕 위 살림집을 마련했다. 포기할 수 없어 가져온 서로의 짐을 좁은 공간에 욱여넣고,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걸 채우고 덜어내기를 반복하면서 한 계절을 보내고 또 다른 계절을 맞았다. 우리는 동네 탐험가인양 시간이 될 때마다 산책을 나섰다. 소문 음식점과 우리가 발견한 식당을 비교하고, 독특한 소품샵을 구경하며, 우연히 들른 카페가 마음에 들면 주변에 소개했다.


이태원 세계 음식 축제를 알게 된 것도 이사 온 이후였다. 저녁식사 후 소화시킬 겸 걷다가 음식 부스 신기한 볼거리, 휘황 찬란한 광경 그야말로 축제였다. 저녁 먹은 걸 후회하며 길거리에 앉아 핫도그를 먹고 뱅쇼를 마셨다. 별천지였다. 좋은 것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르는 건 인지상정. 이후 그 시기즈음이면 일부러 약속장소를 이태원으로 정했다. 로윈 기간 마찬가지였다.


2년 전 그날도 집에서 밥을 먹고 운동 겸 산책을 나섰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트레이닝 차림에 생수 한 병 챙겨 나왔다. 익숙한 공간에서 감지된 낯선 파장, 남편은 안 되겠다며 샛길로 빠지자고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혹시 손을 놓치면 만날 장소를 농담처럼 주고받았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요란스럽게 구급차가 지나갔다. 그날밤 그리고 새벽녘까지도 우리는 잠들지 못했다. 사이렌 소리가 멈추지 않고 울음을 쏟아다.


늦은 시간이지만 조카들과 친구들, 그리고 지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이 돌아오는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앞에서 어깨동무하지나갔던 네 명의 텔레토비는 무사할까, 처키 분장한 아이를 데려왔던 젊은 부부는, 삼겹살집에 앉아 고기 굽던 황비홍 청년들은 모두 괜찮을까. 장난기 어린 웃음,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만, 감히 그들의 안부를 물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쥔 자의 무능은 법적, 정치적, 도덕적 그 어떤 책임도 없다고 했다. 행정 안전부 이상민 장관, 오세훈 서울 시장, 박희영 용산 구청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권영세 의원은 22대에도 용산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부실대응, 직무유기, 과실 치사라는 말은 의미를 잃고 사어가 되었다. 책임자 처벌은 순진한 바람이었다. 무섭도록 기괴한 10월, 더는 가장 좋아했노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후년, 그 이후에도 10월 29일은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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