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졌어요...... 이번에는 정말 믿었거든요.” 초점 잃은 눈으로 A가 말했다. 덤덤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별로 놀랍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도 그녀는 이별했고, 괴로워했고, 이번에는 달랐다고 말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허공만 응시했다. 마치 A 혼자만의 공간인 것처럼 머물다 가버렸다.
이별했을 때, 그녀는 거의 같았다. 들릴 듯 말 듯 속삭였고, 아무 상관없다는 양 마음대로 하던 말을 멈췄다. 아슬아슬한 고요 속에서 ‘A가 거르지 않고 약을 먹었을까’ 생각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동안, 이번 사랑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도 이전의 누군가처럼 매몰차고 사납게 가버렸을까, 전화번호를 바꾸고 페이스북도 끊어버린 채 잠적했을까 상상했다.
A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6월, 이른 더위가 기승 부리던 날이었다. 나는 권태로움을 스스로 달래며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6개월에 걸친 입원 치료를 끝내고 찾아왔다. 정확하게는 보호자인 언니가 데리고 왔다.
헤어진 남자 친구 오피스텔에서 목을 맨 그녀를, 퇴근해 들어와 발견했다고 했다. 남자에게는 이미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했고, 그걸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매달렸던 거라고 A언니가 말했다.
늘 그런 식으로 사람을 질리게 한다고, 화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언니는 말했다. 몇 번 손목을 그었고, 차도에 뛰어들었으며, 닥치는 대로 약을 먹은 일도 부지기수라 웬만해서 놀랄 일도 없다고 했다.
상대방도 기절할 노릇 아니었겠느냐고 말하다 멈칫했다. 당황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놀랄 일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 그녀가 말을 이어가도록 했다.
모은 피를 유리병에 담아 한때의 연인에게 보낸 일, 매일 직장에 찾아갔다 쫓겨난 사건에 관해 얘기하던 언니는 “미친년 차라리 그때 죽지.”라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나는 이번에도 건조하고 사무적인 표정으로 응대하고 시선을 옮겼다.
<이십 대 후반. 여성. 4년제 대학 졸업. 인지적 자원 평균 수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자원은 보유하고 있음. 사고 장애 양상은 시사되지 않음. suicide ideation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음으로 주의가 필요. Depressive Disorder. anxious, aggressive... 가족력은 정확하게 보고되지 않음. 주변 지지체계....‘없음’으로 적었다가 ‘부족’으로 바꾸었다. R/O Borderline PD. 예후는 좋지 않아 보임.>
그해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바짝 마른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그녀와 함께 보았고, 몇 년 만에 찾아온 추위라며 요란스럽게 떠들던 겨울도 함께 보냈다. 그러고도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그녀는 지치지 않고 사랑과 이별을 반복했다. 나는 A에게 다시 입원할 것을 두 번 권했고 의료진과 약물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 수차례 논의했으며, 상담을 중단하겠다는 대응책을 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나를 원망했고 비난했다. 때때로 떠나간 남자들에게 그랬듯이 자기 목숨을 담보로 거래하려 했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어려운 행동을 반복했다. 나는 그녀가 사랑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공허함을 타인의 관심으로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은 위험하다고 배웠다. 목숨 거는 연애, 부나방처럼 뛰어들고 사라지는 사랑은 영화에서나 있는 거라고 믿었다. 상처 받고 찢김을 기꺼이 감내하는 그녀를 몰아세웠다.
새로운 사랑이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보상이라고 했다. A는 항상 절박했고 매번 충실했고 때론 지독했다. 사랑에 몰두하고 있는 중에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했다. 상대를 의심했고 안절부절못했다.
A가 끊임없이 사랑과 이별을 하는 동안, 적어도 나는 삶을 견고하게 견뎌내고 있다고 믿었다. 더는 연애 소설을 읽지 않고, 습관적으로 보던 통속 드라마를 끊었으며, 유행가를 기피했을 뿐이었다. 사랑이 지긋지긋하다고 여겨졌다.
내 삶은 조금 더 건조해졌고 생기를 잃었다. 하지만 조금도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 듦에서 오는 축복이라고 여기며 안심했다. A가 번번이 사랑에 속았듯이 나는 무뎌져 가는 것이 평정심인 양 자신을 속였다.
내 사랑은 절절했고 내 이별은 죽을 만큼 힘겨웠으면서, 남에겐 ‘이 또한 지나간다’라고, ‘쓰라린 경험이 자양분’이 된다고, ‘시간이 약이다.’라고 함부로 말해 버렸다.
나는 사랑을 참 못한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A와 B와 C를 만나고서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에 관해 함부로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사람, 나를 사랑했을까요.” A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A가 나간 자리에 상기된 얼굴의 K가 앉았다. “고백받았어요. 그 오빠는 내가 멀리 있어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내가 오는 걸 알 수 있대요.”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던 여름, A는 이별했고, K는 사랑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 6년 혹은 7년 전에 써두었던 글을 정리했습니다. 이 글에 등장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닙니다. 자신조차 알아차릴 수 없게 바꾸고 비틀었습니다. 하여, 혹시 '내가 아닌 사람 같아'라고 생각하신다면 단연코 오해입니다.
* '쓰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때'가 있어 그저 쓰고 있습니다. 그녀, 혹은 그의 사랑을 존중한다는 건, '감정의 문제'를 말하는 겁니다. 그들의 행동,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숭고하지만, 상대를 고려하고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범죄입니다.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이해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표현이 서툴렀다면,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