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이혼을 결심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긴장한 듯 경직된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8남매 중 일곱째인 여자는 스물셋에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남자와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일찍 시집가면 고생한다고 언니들이 말렸지만, ‘이리 힘드나, 저리 힘드나 어차피 힘든 건 똑같다.’ 싶은 마음이었단다. 손재주는 있으니 굶기진 않겠거니 싶은 계산도 있었노라고 했다.
신상 정보를 쓰는 기록지 앞에서 울퉁불퉁 구부러진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왜 지금일까?’ ‘지금이라도 다행 아닌가.’ 오락가락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힐 때 머뭇거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국민학교를 다니긴 했는데...." 말끝을 얼버무렸다. '괜찮습니다. 검사를 위해 절차상 필요해서 여쭤 본 겁니다. 몇 학년까지 다니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결혼한 첫해 4.1kg의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단다. 하지만, ‘남들 다 하는 출산, 유세 떨지 말라’고 해서, 딱 일주일 만에 재봉틀 앞에 앉았다고 했다. 몇 년 후 딸도 낳았는데, 남편은 진작 일에서 손을 놓았던 터라 이번엔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딸이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 ‘일본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더라.’는 말을 남긴 채, 남자는 떠났다고 했다.
일본에서 옷 장사를 한 것도 같고, 술을 팔았던 것도 같단다. 잘 되었던 것도 같고, 아닌 듯도 했단다. 시장 사람들이 "서방 돈도 잘 버는데, 구지레하게 이 짓을 왜 계속해?"라고 할 때도 그런가 보다 했단다. 돈 한 푼 집으로 보내오는 일 없으니, 새끼 둘 끼고 입에 풀칠하느라 다른 건 생각할 틈도 없었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던 남편이 당연하게 생각될 무렵, 한참 터울 지는 아들이 생겼다고 했다. 노상 아내를 의심했던 남편은 수시로 "나 없는 동안 이놈 저놈 끌어들여 뒹구니 좋았느냐고" 난동 부렸고, 아들이 자신을 닮지 않았으니 친부를 찾겠다며 혈안이 되었다고도 했다. 그가 '미친놈'처럼 눈 뒤집혀 날뛸 때면, 그녀는 ‘정말 애비가 따로 있나’ 싶은 착각이 들었다고 했다. 의심은 치밀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고 말했다.
동업하는 여자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시장 사람 대부분 진작부터 알았을 거라고 했다. 함께 물건을 떼러 오고, 상인 부부 동반 모임에도 참석해서는 ‘이 여자가 진짜 아내’라고 하더라며, 건어물집 장 씨가 귀띔해준 일도 있었다고 했다. 자신을 닮지 않았다며 미워했던 셋째, 유전자 검사를 요구했던 날에도 여자 전화를 받고는 부리나케 나가더라고 했다.
부정한 년, 더러운 년, 남자 앞길 막는 년, 배우지 못한 무식한 년, 태생이 천한 년, 돈독 오른 년으로 28년을 살던 그녀가, 평소처럼 머리채를 잡힌 채 이 방 저 방으로 끌려 다니던 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쇳소리를 내며 날뛰던 날, 하필 그 모습을 큰아들에게 보이고 말았다고 했다. 스카프로 목이 졸릴 때도, 아이들 놀란다고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던 남편이 사색이 되더라고........
더는 살 수 없어서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한창인 새끼들' 때문에 어쩌지 못했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신음 섞인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무튼, 그녀는 막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참기로 했단다. 남편은 규칙적으로 찾아와 여편네 부정 증거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고, 간혹 순종과 사랑을 확인한다며 성관계를 요구했으며,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건을 부쉈지만, ‘막내만 졸업하면’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했다.
숨겨왔던 모습을 들킨 후, 남편은 거리낌이 없어졌다고 했다. 너무 심할 땐 신고했고, 합의서를 써주면 남자는 돌아왔다고 했다. 동네 창피하다며, 문단속부터 하는 자식들을 보면서도, 아이들이 상처 받을까 봐 그게 그렇게 걱정되더라고 여자가 말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제 새끼들은 패지 않으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이런 ‘지랄병’을 닮으면 어쩌나 무섭더라고.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하고 돌아온 날, 찬물에 밥을 말아 김치로 끼니를 때우는데, 자식들이 남편을 데려와 무릎 꿇리고 빌게 했단다. ‘다시는, 이번만’..... 병풍처럼 서 있던 큰아들은 "아버지가 이렇게 울면서 자존심 버려 가며 비는데..."라고 했고, 딸은 곧 있을 상견례에 두 분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단다. 늦은 밤 방으로 들어온 막내는, "엄마만 참으면 우리 가족은 행복할 텐데"라면서 울었다고 했다.
요즘도 아들과 딸에게 매일 한두 개씩 메시지가 온다고 했다. ‘행복한 우리 집, 모두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가 떠나면 우린 엄마를 지켜 드릴 수 없어요.’ ‘도대체 나한테 해준 게 뭐야!’, ‘아빠도 일이 잘 안 돼서, 제일 편한 엄마한테 투정 부린 건데 용서해 주면 안 될까요?’ ‘이혼하시려거든, 두 분이 알아서 하세요. 저희는 누구 편도 아니니까’......
배운 게 없어서 그런지, 더는 참을 수가 없더라고,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여자가 말했다. 이혼하고 지하실 창고라도 얻어서 재봉 돌리며, 아이들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할 수 있게 돈만 벌면서 살 거라고도 했다. ‘화냥년’, ‘재수 없는 년’, ‘분풀이용 장난감’으로, 이십팔 년을 살았던 그녀가 드디어 독립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