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할머니에게만 그랬다. 기괴한 욕을 퍼붓고 죽여 버리겠다는 말씀도 서슴없이 하셨다. 여럿이 있을 땐 대체로 순한 아이 같았다. 그러니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수시로 길을 잃고, 자식을 헷갈려하고, 손주를 구별하지 못하셨을 때도, 그저 연세가 드셨기 때문 일거로 생각했다. 최근 기억을 붙잡아두지 못할 뿐 아니라, 삶이 헐거워지고 빠른 속도로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나이 탓'으로 받아들였다.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고 있는 것조차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점잖고 말수 적은 분이셨다. 묻는 이야기에 대답하시는 것 외에 먼저 말씀하시는 일은 드물었다. 당연하겠지만 주장하거나 요구하는 일 또한 없으셨다. 모든 게 괜찮고, 상관없고, 좋기만 한 분이셨다. 이 때문에, 나는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게 무엇인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일제 강점기를 견뎌온 사람이 그러했듯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셨고, 그 시대 사람답지 않게 글로 된 모든 것을 찾아 읽으셨다. 가끔, 눈에 보이는 글자를 노래처럼 읽으셨다. 그 모습을 흉내 내다보면, 모든 게 놀이 같았고, 저절로 노래가 완성되었다.
아홉 자녀를 두셨다. 장손은 이북에 남겨둔 채 왔다 했고 자식과 사위 몇은 앞서 보내셨다. 열 손가락 꼽아도 다 헤아릴 수 없는 손자 손녀를 두었으나, 유독 누구를 예뻐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더 사랑하셨던 자식도, 안쓰러운 놈도 있었을 테지만 드러내지 않으셨던 것처럼 손주들에게도 공평하셨다. 남달리 사랑받았던 손녀가 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큰집 오빠보다, 이모 딸보다, 내 동생보다 관심과 사랑받았던 경험은 떠오르지 않는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분, 수줍은 사람, 감정 표현이라곤 ‘괜찮다. 좋구나.’ 뿐이셨으므로, 나는 공평하게 내 몫의 사랑을 받았으려니 한다.
할아버지를 향해 ‘몹쓸 인간’이라고 입버릇처럼 내뱉던 여자를 기억한다. 먼지 날린다고 날카롭게 소리치셨던, 한 번도 손주를 무릎에 앉히지 않았던, '공평하게'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 안방 아랫목에 석고처럼 앉아 있던 사람, 할아버지와 겸상을 끔찍해하셨던 할머니. ‘염병할’이라고 하다가, ‘기가 찬다, 기가 차’ 혀를 차셨다가, ‘빌어먹을 영감, 나가 뒤지지 왜 또 기어 들어와’라고 소리쳤을 때, 할아버지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다행히 기억나지 않는다. 왜 그토록 표독스럽고 온 힘을 다해, 삶 대부분을 저주 퍼붓는 일로 보내셨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때로 돌아간대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건 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 탓’에 가까우니까. 할아버지답게 조심스럽게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헐거워지고 싶으셨을 거니까. 할머니를 죽이겠다고 덤벼 든 일, 아버지를 볼 때면 돈 달라 하시곤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눠주던 일로, 어정쩡한 걸음으로 넋 놓고 다니다 길을 잃었던 일로, ‘아, 그때....’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순간을,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때를, ‘안 할 란다. 염병할’이라고 언성 높이셨던 날을, ‘아, 그때....’였구나 짐작할 뿐이다.
엄마로 착각한 나를 향해 ‘영환아, 영환아 니 공부는 시켜줄게’하셨던 웅얼거림을 기억한다. 이 생에서의 마지막 며칠이었을 것이다. 동생 이름을 부르셨던가, 내 손을 잡으셨던가, 앙상한 다리로 간신히 서 계셨던가, 기름기 빠진 살갗이 바삭거리며 스치는 소리였던가... 할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이 흐릿하다. 다만, 병문안 마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리 내지 못하고 울던 나를, 처참하고 참담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서, 서러운 몸 숨길 곳 찾아 걷던, 병원 현관의 지나친 부산함을 기억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마치 돌아가신 것처럼 뵙고 돌아온 후 수시로 화가 났었다. 전쟁도 견뎌낸 이가, 끼니 때운 날보다 굶은 날이 많았던 가난도 통과한 분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새끼를 줄줄이 앞세우고도 살았던 남자가, 그깟 치매에 무너져버리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사는 동안,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것을 대신 찾겠다고 마음먹었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청파동 골목길을, 35번 버스를, 자주 다니셨던 약국을, 즐겨 드셨던 단팥죽을, 닳아 없어질 듯 쓰다듬던 동생의 뒤통수를, 소간이 눈에 좋다고 억지로 먹이던 손을, 박카스 병에 담아 온 굼벵이 즙을, 위태롭게 서있던 마지막 뒷모습을, 앙상하게 휜 나뭇가지 같던 다리를. 눈에 담아 둬야지.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시켜 놔야지 했었다.
2000년 여름, 삶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끔은 기억을 더듬어 확인했지만, 대체로 잊고 살았다. 2019년 여름, 새로 가족이 된 시어머니 삶이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하셨던 사람, 괜찮고, 좋은 것만 있는, 그래서 정말 뭘 좋아하시더라? 알지 못하게 하신 분, 유독 시아버지를 향해서 괴팍해지시는 여자, 어머니가 도둑맞은 기억을 어디서 찾아와야 하나.... 마지막 순간까지, 겉은 까칠하지만 마음속은 여린 큰아들을,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둘째 딸을, 덩치는 커도 어머니 앞에서는 아이가 되는 막내아들만은 붙잡고 계셨으면 좋겠다. ‘아가씨는 누구냐고 열 번, 스무 번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배 아파 낳으신 자식 셋만은 기억해 주세요. 그 나머지는 며느리가 대신해드릴게요. 도둑맞은 기억을 찾아올게요.’ 매 계절, 아픔 없이 보낼 순 없을까 생각하다, 이 또한 삶인가 보다 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