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점심시간이겠구나', '지금쯤이면 전화 올 때가 됐는데' 이젠 능숙하게 소소한 일과를 가늠하고
처리하는 걸 보면 격리 시설에서의 생활도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곳에서는 변수가 거의 없다.
이 예측 가능함이 상당한 안정감을 준다.
식사 준비 중이라는 예고와 문 앞에 밥을 두었다는 안내 등을 포함하면 총 여덟 차례 방송을 듣게 된다.
거의 비슷한 멘트이다 보니, 안내 방송을 틀리지 않고 따라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곧 퇴소할 시기가 되었나 보다. (^^)
자가 격리 기간에는 하루에 두 번 혹은 세 번씩 녹음된 기계음 전화를 받아야 했다.
동일한 내용의 반복된 전화를 받는 일은 신경 쓰였고 불쾌했다.
심지어 그 목소리는 서늘하게까지 느껴졌다. '뭐야, 지금 내가 아프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닷새째 되는 날, 스팸 번호로 등록하고 더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 필요한 내용을 전달하는 건데 왜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 걸까?
되레 자가 격리 기간 중 걸려온 전화는 내 건강 상태를 체크하려는, 어찌 보면 나를 위한 거였다.
반면 생활 치료 센터에서의 방송은 다수를 향한 일방적인 전달에 불과한 거고.
그런데도 이 둘을 대하는 내 태도와 감정은 아주 달랐다.
차이가 뭘까?
저녁 안내 방송을 따라 하다 번뜩 생각이 스쳤다.
스피커 속 총괄 팀장님은 낱말 하나, 문장 하나에도 정성을 들이신다.
허튼 말이 없다. 매번 반복되는 거라면
녹음 방송으로 대신하거나, 한 두 번은 건성으로 하실 법도 한데 대충 끝내는 걸 듣지 못했다.
생각나는 대로 내뱉던, 끝말을 흐려버리는 내 언어 습관을 돌아본다.
시작과 달리 방향을 잃어버린 채 결국 엉뚱한 곳에 도달한 말들.
어디 그뿐일까. 상당수의 말은 지시적이거나, 요구하거나, 자기 과시적이었다.
일상에서의 언어를 너무 낭비했고, 오염된 말을 무분별하게 사용했다.
책임 지지 못할 말을 내뱉고, 나도 잊었으니 상대도 잊었으려니 한 건 또 얼마나 많았을까.
의미 없는 말이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다 사라진 건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다 다짐했다.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하나의 낱말을 섬세하게 고르고, 소중하게 말하는 방법은 배워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