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몇 가지 규칙

by 묻는 사람 K

경험의 확장은 삶에 약이 될까?


거창하게 칼 구스타프 융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나는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우연은 없다고 믿는 쪽이다. 허둥대던 자가 격리 2주간의 경험 덕분에 생활치료 센터에서 지내는 열흘은 충분한 휴식시간이었다. 물론, 격리자를 돌보는 무수한 이의 헌신과 노력 덕분에 가능했지만 말이다.


입소 직전까지도 격리 시설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무려면 집보다 편하겠나, 익숙한 곳에서 안정을 취해야 회복도 빠르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수용'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아주 불편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짐작하지 못한 곳곳에서 위안을 받았고 안정감을 느꼈다.


쉽게 적응하고 빠르게 게을러지는 편이라,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가령, 입소한 날 지급받은 물품만으로 지내기. 커피는 매일 딱 한잔만 마시기(검색해보니 여러 시설에서 커피와 차가 제공된다고 했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10개를 챙겨 왔는데 아주 잘한 일이었다. )


그 외에도, 휴대폰 꺼두기. 업무, 하루 일상을 메모하는 것, 글쓰기, 전자책 읽기 외에는 노트북 사용하지 말기,

매일 아침 씻기, 하루 한 시간씩 스트레칭 하기, 쓰레기는 가능한 적게 만들기, 빨강머리 앤 두 편씩 보기였다. (앤의 상상력이 내게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규칙 조차 없다면

폐인처럼 살다 나갈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지켰지만, 두 가지는 그러지 못했다.

하나는 지급품 만으로 지내기였는데, 닷새째 폐기물 처리에 필요한 테이프가 떨어졌고, 여드렛 날 2리터 생수 한 병을 추가로 받아야 했다. 두 번째, 쓰레기 덜 만들기는 의외로 어려웠는데 매 끼니 도시락 양이 무지 많았다. 심지어 점심엔 과자와 음료수가 디저트로 나왔다. 운동량이 현저히 부족한 상태에서 남김없이 먹는 건 불가능했다. 하여, 이틀째부터는 쓰레기 덜 만드는 일은 아예 포기해 버렸다.

그동안 지나칠 만큼 풍족했다.

그럼에도 매 순간 부족하다고 불평했다.

간소한 생활을 해보고서야, 삶에서 필요한 건

그다지 많지 않음을 깨닫는다.


내게 '후회'란 숙명 같은 거라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단절되고 고요한 시간을 충분히 느끼고 누리지 못한 점이 많이 아쉽다. 어차피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음에도 그 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며 수시로 마음과 에너지를 빼앗겼다. '순간'에 집중하지 못했다. 퇴소 일이 가까워질수록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것만으로도 내게 27일간의 멈춤은 분명 약이 되는 시간이었다고,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고 믿는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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