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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는 사람 K Mar 30. 2023

몇 번의 기회, 반복되는 후회

 갑작스러운 황달증세로 아버지께서 입원하신 지 오늘로 딱 열흘째다. 생각해 보면 전조는 있었으므로 갑작스럽다기보단 무관심했다는 표현이 맞다. 체중이 급격하게 줄었고, 잦은 피로와 무기력을 호소하셨다. 오랜 불면증 대신 잠이 쏟아지더라고도 말씀하셨다. 환절기이거나, 노화일 거라고, 잠을 푹 주무실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느냐고 말했던 건 나였다.   


 동네 병원에서 혈액 검사를 받고 바로 다음날 응급실로 들어가셨다. 새벽엔 MRI를, 다음 날엔 내시경과 X-ray 검사를, 삽관으로 담즙 빼내는 시술을 끝냈다. 조직 검사를 한지 닷새만에 담도암 소견을 들었다. 코로나 탓에, 담당 의사는 만날 수 없었고, 면회도 제한되어 간병인을 통해 그나마 최소한의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입원하러 가시는 길에 적금을 해약하셨다는 이야기를 큰언니에게 들었다. '컨디션은 괜찮은데, 심각한 건가?' 담담하게 물으시더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진작 자식들 몰래 '시신 기증'서약을 하셨던 어머니는 아버지께도 넌지시 의사를 물으셨는데, 대답이 없으시더라고 했다. 엄마건 아빠건 시신 기증 같은 건 말도 꺼내지 말라고 팔짝 뛴 건 이번에도 나였다.  


 한껏 주눅 들고 긴장한 어머니께선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에 가셨고, 우리는 순번을 정해 동행했다. 면회도 잘 안되는데, 로비에나 있다 돌아올 것을, 매일 그리로 향하는 발걸음을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일하는 사이 큰언니와 어머닌 추모공원 두어 곳에 다녀오셨다고 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리' 준비해놨어야 했다면서, 가족 묘를 마련해 두신 시아버지 준비성에 감탄하셨다.


 '엄마 없는 아빠를, 아빠 없는 엄마' 그리고 '엄마 아빠 없는 나'를 상상해 본 적 없어서, 이런 상상만으로도 불길하고, 부정하고, 불안했으므로  수시로 공상 속으로, 시답지 않은 잡다한 일들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끔, 아버지에게는 몇 번의 봄이 더 남았을까, 우리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계절은 얼마나 될까 생각했다.  


 봄 꽃이 하도 흐드러지게 피어서,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수시로 멍해진다는 말을 한건 나였고, 여덟 자리 가족 묘를 마련해 놔서 마음이 놓인다고, (마치 숙제 끝낸 아이처럼) 홀가분하게 말한 건 엄마였다. '너는 진주 넓은 곳으로 테니까, 그때는 빨리 올 수 있으니까, 떨어져 있다고 서운해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엄마였다.


 어머니 대장암 수술, 아버지 위암 수술과 전립선 암 판정,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빌고 또 빌었다. 절실함은 생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쉽게 사그라들었다. 중요한 것들은 번번이 별것 아닌 것들에 치여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이후로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었으나, 대부분 알아채지 못했고, 가끔은 쉽게 지워져 버렸다.


 삶은 후회를 쌓아가는 일이라고, 내 삶은 8할이 흑역사와 후회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가 있고, 유쾌한 어머니가 있고, 함께 초조한 시간을 견디는 언니들과 동생이 있고, 존재만으로 충분한 조카들과 든든한 형부, 그리고 남편이 있다. 미래의 슬픔에 압도되어 '지금 이 순간', 내게 허락되었음을 놓쳐선 안 된다.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인 줄 알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기엔 봄 꽃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햇살 받은 개나리는 눈이 부시니까. 통통하게 살 오른 길고양이는 사랑스럽고 이 모든 걸 눈에 담기에도 벅차니까. 그러므로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일상을 지낼 .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살아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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