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장 남아 있나요?
내게는 어린 시절의 사진이 없는 편이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사진에 남아 있는 것이 유일하다. 집 마루 위, 큰방 입구 벽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장수
사진과 할아버지 환갑사진이 있었다. 그마저도 먼지 쌓인 액자 속에서
늘 같은 표정으로 있었다.
우리 집에는 일찍 텔레비전이 있었다.
작은 아버지가 베트남전에
다녀오시면서 생긴 TV이었다.
그 흑백TV 속 외국 명화를 보면, 거실이나 복도에 작은 액자들이
빼곡히 놓인 장면이 나왔다.
가족들의 환한 웃음,
서로 기댄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을 보며 참 신기했다. '저건 그들의 인생사진이겠구나.' 싶었다.
비록 문화와 삶의 방식은 달라도,
가족이 함께 담긴 한 장의 사진이
그 사람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섬이 정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
늦가을 햇살 아래 피어난
꽃과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잎을 보며 이곳은 5월에 다시 와야겠다고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두 번의 5월이 왔지만,
마음이 메마르다는 핑계와 바쁘다는 이유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시간은 흘렀고,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탐방을 간다고 했다.
6월 27일 토요일,
드디어 나는 다시 섬이 정원에 서게 되었다. 그날 스스로에게 인생사진을 남기자고 약속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어떤 색이 나를 가장 돋보이게 할까?'를 생각했다.
눈은 방 안의 옷들을 훑으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빨간색에 시선이 멈췄다.
푸른 잎과 꽃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빛날 색이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지만, 오늘만큼은 옷이 내 꽃받침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소풍 같은 날, 하늘은 유리처럼 맑았다. 장마가 물러간 뒤라 공기는 한층 청량했고, 바람마저 부드러웠다.
사진을 찍을 장소를 찾으며 걸어가다가 문득 떠오른 뉴스 한 장면이 있었다.
절벽 끝에서 인생사진을 남기려다
발을 헛디뎌 생을 마감한 사람.
그분도 아마 나처럼, 한 장의 사진에 자신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아름다움과 생이 함께 멈춰버린
그 사연이 그날따라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인생사진은 안전한 자리에 서서,
천천히, 마음을 담아 찍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발걸음은 고동산 아래의
하늘정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정원장이 2년 동안 계획하고 고민하며 완성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 안에는 그의 고뇌와 사랑,
수없이 흘린 땀방울이 스며 있었다. 밀짚모자 아래로 흐르는 땀은 지금도 그곳을 적시고 있었고,
꽃과 나무는 그 정성을 잊지 않은 듯 빛나고 있었다.
푸른 햇살에 반짝이는 하늘 호수와 맞닿은 정원에는 못이 있었다.
못 속 물 위에 수줍게 핀 꽃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주인공이 바뀔 때마다 물은 앞·뒤·옆, 그리고 전신을 고스란히 비춰주었다.
그 속에 나를 비춰보니 걸어온 길이 보였다. 기쁨과 아픔, 사랑과 이별, 지나쳐버린 소중한 순간들....
잠시 멈춰 서서 마음속으로 그 시간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인생사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함께 간 분들의 표정과 정원장이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는 정작 귀담지 못했다.
요즘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화면 속 영상과 사진에 파묻혀 대화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사랑했고
사랑할 사람들 사이에,
어쩌면 필요한 건 인생사진
한 장일지도 모른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사진.
그 한 장이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진 속에는 웃음과 바람, 그리고 그 순간의 온기가 담겨 있다.
나는 그날, 가장 나다운 자신을 담았다.
연못 위로 부드럽게 휘어진 다리가 있어 모네의 그림을 현실 속으로 흘러나온 듯한 곳이 있다. 다리 아래로는 수련이 은은하게 피어 있었다.
바람은 살랑였고,
햇살은 연둣빛 잎들을 반짝이며
무성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챙이 있는 모자를 눌러쓴 채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모네의 다리 중앙에 섰다.
지나온 길을 천천히 돌아보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함께 간 이가 셔터를 눌렀고, 찰칵!
인생의 한 장면이 사진으로 남겨졌다.
사진은 단순한 여행의 추억을 넘어선다. 그것은 내가 명화 속 수채화를 현실로 만난 순간, 내 마음속 수채화와 겹쳐진 찰나를 담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그 한 장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치 모네의 그림처럼,
사진작가 도로시아 랭은
"사진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순간을 포착하여
그 의미를 영원히 간직하는 행위"라고 했다.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순간을 카메라 눈에 시간을 정지시켜 보관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스마트폰 속에 있는 사진을 액자에 넣어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바자회가 열린 내동천 마을 행사에서 액자 두 개를 이천 원에 구입했다.
그 액자 속에 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모습과 아름다운 자연이 발산하는 신비로운 시간을 넣어둘 것이다.
순간을 남기는 인생사진,
언젠가 이 사진을 누군가와 함께 보며 "이날 참 좋았지" 하고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자녀들은 "우리 엄마가 행복하게 사셨네!"라며 끈끈한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잊고 지나가는 찰나들이 많다. 하지만 마음에 남길
한 장의 사진은
순간을 영원히 머물게 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나를 나답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아 줄
'인생사진' 한 장을 남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