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요의 품

세상과 나, 그 사이의 따뜻한 리듬

by 그레이스



고요는 멈춤이 아니다
흐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정적 속에서 모든 것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새벽, 한강 중턱의 물결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빛은 아직 오지 않았고 세상은 하나의 색으로 잠겨 있었다.


하늘과 강, 공기와 물이 구분되지 않는 풍경. 모든 것은 흐르지 않으면서도, 이미 흘러가고 있었다.



빗소리가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소리는 침묵을 깨뜨리기보다, 오히려 침묵의 질감을 드러내는 듯했다. 조용한 세계는 멈춘 세계가 아니었다. 그 안에서는 미세한 생의 움직임들이 서로를 스치며 지나갔다. 정적이란, 소멸이 아니라 가장 낮은 호흡으로 존재하는 형태였다.


아침이 시작되기 전, 나는 물 한 잔과 사과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의식이 천천히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샤워실의 문을 닫자 세상과의 경계가 부드럽게 닫혔다. 따뜻한 물줄기가 어깨를 타고 흘렀고, 그 온기가 천천히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출근 시간이 조금 늘어졌지만, 그 안에서 몸과 생각이 고르게 풀렸다.


삶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위안을 준다.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미세한 온도의 복귀로써. 어디선가부터 다시 숨이 고르게 맞춰지고, 그때서야 하루가 비로소 시작된다.


비는 여전히 도시 위로 내리고 있었다.

차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속도를 달리했고, 그 속도들 사이로 서로 다른 리듬이 생겨났다. 사람들의 마음도 그 리듬을 따라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도시는 묘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혼란도 그 안에서는 곧 하나의 조화로 수렴되었다.


문득 따뜻한 커피가 생각나 차를 몰고, 드라이브스루가 가능한 카페로 향했다. 차창 너머로 건네받은 카페라테 한 잔.

뚜껑을 열자 하얗게 부풀어 오른 우유거품이 보였다. 어떤 날은 그 위에 하트가 그려져 있었지만, 오늘은 단지 밀도 높은 풍성한 거품이었다. 부풀어 오른 우유거품의 결이 새벽처럼 잔잔하다. 입술 위에 하얀 거품이 묻을 만큼 한 모금 머금었다. 바깥의 비와 커피의 온도가 한결이 되어 유리창의 차가움이 서서히 지워졌다. 그 짧은 순간, 세상은 잠시 균형을 이루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커피의 종류도 자연스럽게 바뀌어 간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비엔나… 그리고 이 계절에 어울리는 따뜻한 카페라테 한 잔. 날씨의 질감과 음료의 질감이 겹쳐질 때 세상은 내 안으로 조용히 들어온다. 그 조용한 일치 속에서 나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한때 흐린 날은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회색빛 우울의 잔향 속에서 침묵은 공허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멈춤은 정체가 아니고 느림은 결핍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이 변했을 뿐.


계속 이어지는 비에 세상은 점점 더 희미해져 경계는 옅어졌다. 그러나 그 희미함 속에서 오히려 모든 것은 또렷했다.


멈추지 않는 정적, 움직이지 않는 흐름.


이 도시는 그렇게 존재의 가장 깊은 형태로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흐린 날의 세상에도 고요히 따뜻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