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진부해졌다고 느끼는 순간은 대개 특별한 사건이 사라진 뒤에 찾아온다.
격렬한 기쁨도,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고통도 없이 하루가 하루를 무난히 통과할 때, 우리는 삶을 향해 진부하다는 말을 꺼낸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반드시 삶에 대한 실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삶이 일정한 궤도 위에 올라섰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감당해야 할 위기가 줄어들고, 매 순간 판단을 요구하던 긴장이 풀릴 때, 비로소 사람은 삶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나의 일부처럼 여겼던 친구와의 생이별 이후, 삶은 오랫동안 진부함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유지되었다. 감정은 늘 과잉 상태였고, 하루는 지나간다는 느낌보다 버텨낸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 시절의 나는 아픔을 인정하는 일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인정하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말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리움은 반드시 어딘가로 흘려보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문장이든, 메모든, 어떤 글자라도 띄워 보내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정체되어 스스로를 압박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았던 감정도 시간이라는 흐름 앞에서는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갖게 되었다. 아픔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흔들림은 서서히 무뎌졌다. 이전에는 감정의 중심이었던 기억들이 어느 순간 가장자리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한편으로는 감사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허무가 남았다. 그 감정은 어느 한 단어로 단정하기 어려웠고, 그렇기에 더 오래 남았다.
이 시간을 나는 오래 기다려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견딜 수 있는 상태를, 감정이 삶의 중심을 점령하지 않는 시기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고르게 돌아오는 거리, 더 이상 그 시절의 시간을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서 있다는 감각은 묘한 안도와 함께 또 다른 양가의 마음을 불러왔다. 관계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은 상실이었지만, 동시에 삶이 다시 제 속도를 찾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끔은 그리움이나 사랑이라는 단어로 그를 한 번쯤 호출해본다. 그것은 다시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단어들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호출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행위라기보다, 이미 잘 지나왔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알려주는 점검에 가깝다. 감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이제 나는 모든 감정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시절의 흔적에 감사한다.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되, 다시 꺼내지 않아도 될 만큼만 접어서 서랍 속에 넣는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위치에 두고, 삶의 다른 부분들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긴다. 정돈은 망각이 아니라 배치에 가깝다. 무엇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의 무게는 달라진다.
그래서 요즘의 삶은 가끔 진부하다. 그러나 이 진부함은 공허함이 아니라 안정에 가깝다. 더 이상 모든 날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들이 이어진다. 삶이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삶은 제자리를 되찾는다. 진부함은 끝이 아니라, 한 번의 큰 파도를 건너온 이후에야 허락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