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보는 삶과 구조
쇼핑몰에서 서점에 잠깐 들렀다. 기다리는 사람도, 서두를 이유도 없는 시간이었다.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펼쳤지만, 읽다가 덮어버렸다. 누군가를 이해시키기보다 자신이 높은 자리에 서 있다는 감각을 먼저 증명하려는 문장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타인은 하나의 사례로 정리되고,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며 그 뒤에 남을 오해나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방식이었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는 독자가 각자 생각하고 느낄 여지를 남기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읽는 나로서는, 그 책임이 모두 독자에게 전가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글 속에서 시선과 태도를 살피며 스스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몇 층 아래 지하 식품코너에 장을 보러 내려갔다. 며칠 사이 필요한 물건들이 자연스럽게 늘어 있었다. 설 명절을 앞두고 할인 상품과 한시적으로 나온 제품들이 함께 진열돼 있었고, 익숙한 브랜드 옆에는 낯선 구성의 묶음 상품들이 눈에 띄었다. 평소 집 앞 정육 코너를 이용하다가 오랜만에 싱싱한 연어를 담았다. 외식보다는 부담이 적고, 집에서 알맞은 크기로 잘라 회와 구이로 먹기에는 충분한 선택이었다. 장을 보는 행위는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생활의 구조를 점검하고 삶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어떤 재료를 얼마나 준비할지, 아이들의 식습관과 방학 일정, 냉동고와 냉장고의 용량까지 자연스럽게 계산하게 된다.
아이들 방학으로 식탁의 차림이 조금 달라졌다. 자주 먹지 않던 재료들이 선택되고, 냉동실과 냉장고를 더 자주 열어보게 된다. 하루 이틀 지나면 처음 계획했던 장보기 목록은 흐릿해지지만, 그런 상태로도 생활은 이어진다. 이 사소한 반복 속에서 가족 구성원의 필요와 시간, 에너지, 경제적 여건이 맞물려 돌아가며 생활의 구조가 보인다.
1인 가구는 계속 늘고 있는 추세지만, 혼자 벌어 혼자 살기조차 쉽지 않은 조건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일은 개인의 의지나 성향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결혼을 미루거나 다른 방식을 선택하는 이유가 점점 비슷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거비, 양육비, 교육비, 생활비,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의 한계가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사실은 점점 더 분명해진다. 개인적 결정의 영역을 넘어 제도적 경제적 구조가 삶을 안내하고 있는 셈이다.
AI와 다가올 AGI로 대표되는 기술 변화는 고용과 노동의 방식뿐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기준 자체를 흔들고 있다. 자동화, 플랫폼 노동, 인공지능 서비스의 확대는 노동시장뿐 아니라 교육, 가정, 주거 정책 등 사회 전반에 변화를 예고한다. 이와 관련된 문제는 이제 특정 세대만의 고민이 아니며, 오늘의 선택이 그대로 다음 세대에 이어진다.
장보기 후 손에 든 영수증에서 느끼는 식료품비 부담은 단순한 소비 문제가 아니었다. 변화하는 노동 환경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점점 더 큰 구조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식품구입의 사소한 일상이, 결국 우리 삶과 노동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