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씩

라디오 워싱턴 미주경제 주최 코로나 백일장 성인부 금상

by 서재진

3월 13일 금요일.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토요일 SAT 보는 학생들에게 격려 문자를 보냈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으니 담대하라고 전했다. 하지만, 몇 달 동안의 수고가 무색하게 시험이 취소되었다. Covid-19과 함께 세상이 멈춰버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 여정,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과연 고등학교나 졸업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자아냈던 사춘기 방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쪽지 시험을 본다는 말에 걱정되어 눈물이 날 정도로 심신이 미약했다. 뒤를 이어 계속되는 대학 진학 실패로 자존심은 바닥을 쳤다. 이를 만회하고자 선택한 유학 준비는 어떠했는가? 점수가 변변치 않아 매달 치르는 비싼 토플 응시료로 떡볶이 장사를 했어도 건물 한 채는 올렸을 거라는 핀잔을 들어가며 겨우 입학 허가서를 받았건만 IMF 금융위기가 앞을 가로막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 집도 사기를 당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듯 학비가 면제되고 장학금이 지급되어 안도할 무렵 9.11 사태가 터졌다. 뉴욕 주에 속한 장학금이 모두 끊기면서 낙동강 오리 알 탄생 비화를 몸소 체험했다.


2000년도 유학 당시 먼 훗날 미래처럼 읊조리던 2020 비전 프로젝트의 2020년 오늘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종 Covid-19과 함께 도적처럼 찾아와 때 아닌 3차 세계 대란을 겪고 있다.


어린 시절, 언덕을 넘고 숨을 고르고 나면 더 높은 산봉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만 들어가면 열릴 줄 알았던 신세계 문은 협소했고, 유학만 다녀오면 펼쳐질 줄 알았던 유토피아는 없었다. 역경 속에 단련된 근육으로 주도 면밀하게 맞이해야 할 더 큰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모두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기막힌 현실이 주어졌다. 20년을 내다보며 장기 계획을 세우는 것이 무모해 보이는 ‘건강하게 눈 뜨면 성공’인 오늘을 살고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 고비를 넘길 때마다 다져진 잔근육으로 하루씩 살려고 한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하루를 누릴 것이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해 온 내 인생, 사십여 년 동안 쌓아온 공든 탑을 헐고 새로 짓는다 해도 무서울 건 없다. 벽돌 한 장을 움켜쥘 수 있는 건강한 하루만 주어진다면 그것으로써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할 것이다.


하루씩 살다 보니, 그전에는 묻혀서 보이지 않았던 가치들이 새롭게 내 눈에 들어온다. 손수 장을 봐서 차려지는 매 끼니의 수고로움이 그중 하나다. 내 눈에 더 그럴싸한 일을 하기 위해 미뤄뒀던 식사 준비는 하루 세 번 숭고한 의식처럼 치러진다. 집 앞 산책로에서 만나는 이름 모를 풀꽃의 아름다움과, 영롱한 사슴의 눈망울, 손바닥만 한 작은 몸으로 나무를 두드리며 청명한 소리를 내는 딱따구리도 보이기 시작한다.


Covid-19으로 삶은 하루 단위로 토막 나고, 세상은 멈춘 듯하나 실은 그 반대였다. Covid-19 덕분에 하루 단위의 삶은 숨겨진 보화를 찾는 것처럼 흥미진진해졌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 분량의 축복에 감사하며 고단한 몸을 뉘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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