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이 함께 꾸는 꿈

미국 H 마트 30 주년 기념 고객 수기 공모전 1등 수상작

by 서재진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집을 나섰다. 친정엄마와 이모가 워싱턴 공항 출구까지 잘 찾아오실지, 입국 심사는 무사히 통과하실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딸과 사위 주시려고 밤새워 빚어 얼린 쑥송편을 등에 짊어지시고, 앞에는 주소 목걸이를 달고 나오시는 내 어머니의 모습에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2000년에 혈혈단신으로 처음 밟은 미국 땅이 바로 워싱턴 국제공항이었는데, 이제는 이민자의 아내가 되어 남편과 함께 친정엄마를 맞이하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찹쌀 쑥 송편을 못 먹여서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에야 그 소원을 푸신다며 앞마당에서 뜯은 쑥과 손수 농사지으신 찹쌀로 반죽을 하고 뒷산에서 딴 솔잎을 섞어 갓 쪄낸 송편을 입에 넣어주시면서 한없이 행복해하셨다.


뉴욕 주 북동쪽의 ‘이타카’라는 작은 시골도시에 위치한 코넬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나에게는 작은 꿈이 있었다. 내 어머니 손을 잡고 교정을 거니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시고도, 새어머니의 반대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내 어머니의 소원은 하고 싶은 공부를 원 없이 하는 것이었다. 자식은 부모의 꿈을 이뤄주는 대리인이 아니라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두 분을 모시고 예닐곱 시간을 넘게 운전해 코넬대학교에 갔다. 딸과 사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이 나신 두 분은 뒤에서 콧노래를 부르시며 좋아하셨다. 피곤하실 텐데 눈 좀 붙이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이시다.


엄마 손을 꼭 잡고 교정을 거니는데, 힘에 부치신 지 의자에 앉아 쉬자고 하셨다. 학교가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다고, 차도 없이 어떻게 지냈냐고, 이런 줄 알았다면 빚을 더 내서 중고차 한 대라도 사 줬을 걸 하신다. 내 어머니는 다 퍼 주시면서도 내 자식에게 더 줄 것이 없음에 항상 마음 아파하신다.


도서관에 가지런히 진열된 내 석사논문을 찾았다. 쑥스럽게 웃으며 첫 장을 펴는 순간 낯익은 한글로 쓰인 ‘이 논문을 항상 배움에 목말라하셨던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께 바칩니다.’라는 글귀를 보시자마자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네가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타관에 사는 것도 힘이 드는데, 낯설고 물 설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미국이라 걱정을 많이 했다. 유학 첫 학기에 받아주는 교수가 없고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해서 눈물이 앞을 가려 걸을 수가 없다고 네 언니에게 이메일 했을 때, 내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를 다시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석사 딸, 박사 딸보다도 난 행복한 딸이길 바랐거든.”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애잔하게 서려있는 내 어머니의 사랑은 갈대처럼 방황하는 나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했다.


함께 하는 한 달이 이렇게 짧을 줄이야. 뉴욕으로, 워싱턴디씨 박물관으로 흘러가는 일분일초를 아쉬워하며 내가 아는 미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우리 모녀는 행복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엄마가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우리 딸 성공했구나. 꿈을 이뤘어.”


“에이, 엄마 아직은 아녜요. 공부도 다 못 마쳤는데…”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풀어내는 내 어머니의 성공 철학은 이렇다.


“네가 여자 나이로는 적지 않은 28살에 유학을 갔을 때, 짝도 없이 혼자 가는 모습이 안쓰러워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네 아빠랑 엉엉 울었다. 그런데, 이렇게 착하고 성실한 사위를 만났으니, 성공한 거 아니냐. 열두 번씩이나 떨어지고 열세 번 만에 극적으로 운전면허 합격해서, 남편 도움 없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으니, 그것 역시 기적 같은 성공이고. 고단한 몸을 뉘일 집도 장만했고, 나가서 일할 직장도 있고,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건강도 있으니 이 보다 어떻게 더 성공할 수 있겄냐.”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나보다 한 수 위시다. 어머니 보시기에 한없이 어리기만 한 막둥이인 나는 받을 축복에만 목메어하고, 내 어머니는 이미 받은 축복을 계수하며 삶을 누리고 계신다.


내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음에 감사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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