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25일
언니 결혼식 한 달 앞두고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과로로 무릎관절에 무리가 가서 일어나 걸으실 수도 없을 만큼 많이 편찮으셨다. 우리 사 남매에겐 사시사철 항상 철인 같으신 엄마가 편찮으시다는 사실은 과히 충격이었다. 언니와 나는 안암동에서 자취 해서 부모님을 곁에서 돌봐드릴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더 가슴이 아팠다.
엄마가 서울로 올라오셔서 근처 고대 안암병원에 진찰 받으러 가신다는 말 듣고 나서 오전에 영어학원에 수업 들으러 갔다. 수업 마치고 오후 4시경에 집에 잠깐 들러 요기 하고 좀 쉬다가 사당동 과외 아르바이트 가려고 하는데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고대안암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과외 가기 전에 잠깐 엄마 얼굴이나 보고 가라고 했다. 놀란 마음에 그 길로 병원에 달려갔다. 강인함의 대명사인 우리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시다니 믿기 어려웠다. 병원에 도착해서 엄마를 뵈니 엄마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드리우신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병이 심각한 모양이구나, 의사가 다른 사람 다 제쳐놓고 이렇게 나부터 급하게 입원시킨 걸 보면 말이다.”
“아니야, 엄마~ 엄마가 복이 많아서 오랫동안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쉽게 입원할 수 있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병원복 입으신 엄마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참 어색했다. 과외시간이 되어서 마을버스 타고 성신여대 지하철 역으로 갔다. 사당동으로 향하는 4호선에 올라탄 이후로도 병원가운을 입으신 엄마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아 지하철 안에서 눈곱을 떼는 척하면서 훌쩍거렸다. 우리 사 남매가 장성한 이후로 난생처음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셨기에 엄마가 입으신 병원가운, 그리고 병원침대에 누우신 모습도 너무 어색하게만 보인다.
서울로 올라와서 내 공부, 내 일에 너무 바쁘게 지내다 보니 그 사이에 부모님께서는 더 쉬이 늙어가시는 것만 갔다. 그런 부모님께 자식으로서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더 죄송한 마음뿐이다.
한 달 뒤면 언니가 결혼 하는데, 신랑 신부 어머니가 나란히 걸어 나가서 결혼식장 초를 환하게 밝히셔야 하는데, 그때 우리 엄마가 걸으실 수 있을까. 눈앞이 캄캄했다. 언니는 결혼 준비로 정신이 없을 터이고 나는 한 달 뒤면 네 번째 도전하는 GRE 시험공부도 마무리해야 하는데 이래저래 생각에 치이고 걱정만 앞섰다.
작년에 두 번씩이나 치른 GRE 시험결과가 안 좋아서 한해 더 준비해서 그해 10월 초에 세 번째 봤건만 작년보다 더 못 봤다. 유학 가는 게 하나님 뜻이 아닌가 보다 하면서 거의 체념반 푸념반 식으로 내게는 거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네 번째 GRE 준비를 엄마 병간호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 가지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의사 선생님께서 아침에 왕진을 다녀가실 때에 엄마가 의사 선생님께 간곡히 부탁하셨다.
“선생님, 제 딸이 한 달 뒤에 결혼하는데 저 결혼식장에 촛불 켤 수 있게 고쳐주세요. 빨리 낫게 해 주세요. 의사 선생님만 믿을게요.”
소녀처럼 말씀하셨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걱정하지 마시라고, 따님 결혼하실 때 식장에 당당히 걸어 나가셔서 촛불 켤 수 있게 다리 고쳐드리겠다고 호언장담하셨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일 수가 있을까. 그렇게 건강하신 분이, 아침 꼭두새벽부터 자정이 넘도록 지칠 줄 모르고 일하시던 분이 가문의 중대사를 코앞에 두고 일어나시지도 못할 만큼 편찮으시다니. 게다가, 나는 어떻고. 남들은 몇 개월 만에 준비해서 치르는 시험을 나는 거의 2년이 넘도록 준비해서 보고, 그 비싼 시험을 세 번씩 치르면서도 점수가 형편없어서 네 번째를 준비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엄마 병간호에 시험준비에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일 수가 있을까. 네 번째 치르는 GRE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도 겨우 한 달 남짓한데 말이다.
너무 속상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돌봐주고 계신 건가. 우리 집을 돌보고 계신 건가. 6년간의 신앙공백기를 깨고 다시 믿기 시작한 하나님이 조금은 원망스럽고 내게 주어진 시련의 참의미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새벽을 열어 교회로 달려 나간 그 길이 내게 축복을 안겨다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재앙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 같은 찹찹한 심정이었다.
새벽에 교회 갔다가, 바로 새벽 6시 50분에 시작하는 영어학원 수업, 독해, 청취, 회화 이렇게 세 과목을 나란히 듣고 집에 돌아와 점심 요기를 하고 잠깐 쉰다. 곧 병원에 가서 엄마 말동무 해드리면서 병원침대를 책상 삼아 GRE 단어 공부와 과외 준비를 한 뒤 이른 오후면 과외를 하러 일산에서부터 잠실, 사당동까지 한 바퀴 돈다. 11시가 다 되어서 과외가 다 끝나면 병원으로 가서 엄마 씻으시는 거 도와드리고 집에 돌아와서 시체처럼 픽 쓰러져 잤다. 이런 때일수록 내가 더 힘내서 엄마 위로해 드려야지, 재롱도 피우고 애교도 부려야지 하지만 내 얼굴에 가득 찬 수심을 감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른한 오후, 엄마 병원 침대에서 GRE 시험공부를 하는데 엄마가 말씀하신다.
“재진아, 천만다행이지 뭐냐. 내가 만약에 결혼식 바로 전날에 쓰러졌더라면 우리 딸 결혼하는데 촛불도 못 켜고 그냥 누워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결혼식 치르기 한 달 전이니까 병원에서 다리 고치고 결혼식에 걸어 들어가서 촛불도 켤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의사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병원에 누워서 절대안정을 취하고 계속 주시는 처방약 잘 먹으면 수술하지 않고도 다 나을 수 있다는구나”
엄마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 천만다행이라는 말씀을 하실 수가 있을까. 내게는 설상가상이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이 더 꼬인 것 같은데 말이다. 한 달 전에 쓰러지신 게 다행이라면, 차라리 그냥 내처 건강하셨으면 병원에 입원하시지 않아도 되셨을 텐데. 내겐 그게 오히려 천만다행인데 말이다.
난 엄마 딸이다. 얼굴 생김새도 심지어, 새끼발가락 못생긴 거, 한 달마다 한 번씩 앞머리에 두세 개씩 어김없이 나는 흰머리 새치까지 꼭 닮은 엄마의 붕어빵이다. 새치를 뽑고 나서 한 달 뒤면 어김없이 나는 새치를 어떨 땐 궁금해서 감은 머리를 뒤적이며 찾는다. ‘여기 있다’ 하면서 흰머리 새치를 쪽집게로 찾아 뽑으면서 난 역시 엄마딸이야~한다. 식성을 물론 이어니와, 다섯 살 이후로 살이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으시다는 엄마의 신체적 특징까지 꼭 빼닮은,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 쌍둥이처럼 나와 엄마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젠 이런 모든 것 위에 엄마의 생각까지 닮으려 한다. 내 어머니의 삶의 철학을 닮으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아무리 옆을 둘러보고 앞을 내다보아도 천만다행인 구석이 하나도 없다. 석사의 모든 과목 이수를 마쳤는데, 5학기 째부터 학교로부터 돈이 끊겨 이제껏 한 모든 걸 물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여태껏 쏟은 정력과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렇다고 집에서 돈을 받아 학비를 내고 다니자니 속이 상해서, 부모님과 식구들에게 죄송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주립과 사립대학이 공존하는 코넬에서 특히 뉴욕주립대학으로 속한 과를 다니는 외국인 학생들은 작년 9월 11일 테러사건 이후로 뉴욕주에서 받는 교육지원금이 현격하게 줄었다. 비싼 학비를 내 돈으로 내고 남은 학위를 마쳐야 하는지 아님, 학위를 중도에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매 학기 학교에서 지원하는 재정상황에 따라 본인의 학업여부를 결정해야만 한다. 막막한 낙동강 오리알이나 다름없다.
나 역시도 줄어든 TA(강의조교) 자리 때문에 이번학기 그리고 저번학기 연속으로 두 학기 째 집에서 등록금을 받아쓰고 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나올 때에는 장학금 준다는 학교 마다하고 첫 학기부터 내 돈 내도 다녀야 하는 코넬을 선택하면서 나는 개선장군처럼 너무나도 당당했다. 부모님께 한 학기만 돈을 대 달라고 부탁드리고 나서 만약에 다음 학기 돈이 결정되지 않으면 돈 준다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던지 아님 휴학을 하고 이곳에서 접시를 닦는 한이 있더라도 내손으로 등록금을 마련해 공부할 터이니 걱정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런 현실에 부딪히고 보니 이제껏 호언장담하던 나의 모든 결심들이 내 알량한 자존심아래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도서관에서 한 시간당 10 불을 받고 일하는 아르바이트 직업도 솔직히 부끄러워 못하겠더구나. 내가 여기 공부하러 왔지, 겨우 한 시간에 만원 남짓한 돈 벌자고 여기 왔어? 하면서 비겁하게 내 속을 감춘다.
그래도 천만다행이지 뭐냐 하던 엄마의 말대로 내게 무엇이 천만다행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부모님과 식구들에게 죄송하긴 하다만, 학교로부터 돈을 못 받는 이 상황에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이곳에서 학위를 마칠 수 있도록 한 학기 더 다니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무작정 돌아가고 싶었던 내 맘이 다시 자리를 찾고 그래도 학위를 마쳐야 한다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맘은 가시밭 같을지언정 몸만은 아직도 아무 탈 없이 건강하여 잔병하나 치르지 않고 건강하게 여기 남아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다. 작년부터 꾸준히 TA 조교 자리를 놓고 기도했지만, 내 기도제목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변치 않고 그대로 간직되어 있으니 참으로 천만다행이다.
오늘부터는 이제껏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지금도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앞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실 은혜를 기대하면서 감사하련다.
여기 코넬에 오면서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내 인생은 축복으로만 점철되는구나 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면서 그 축복의 샘이 말라버린 건 아닐까 의심도 했다. 하지만, 새록새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속에서 내가 깨닫는 것은 나는 아직도 그 축복가운데 있고, 앞으로 나의 삶은 여전히 하늘로부터 내리는 신령한 축복으로만 점철 지워질 거라는 거다. 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항상 그분의 계획이 내 것보다 훨씬 더 나았다. 지금은 잠시, 내가 우둔하여 그분의 크신 뜻이 내 뜻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그 크신 계획과 나를 향한 원대하신 그분의 꿈은 여전히 바쁘게 진행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맞아, 그랬었던 거야. 이걸 더 늦지 않은 지금 깨달았으니 천만다행이지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