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일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이다. 1953년 7월 27 일엔 휴전선이 그어졌고 그로부터 20년 후 1973 년 7월 27일 내가 태어났다. 그러고 보니 한국 나이로는 서른이 되는 셈이다. 적지 않은 나이다. 고등학교 1 학년 국어시간에 시를 배우는데, 시 한 구절 때문에 적잖은 논쟁이 있었다. 문제가 되었던 싯귀절은 “서러운 서른 살”이었다. 나른한 5교시 더군다나 시를 배우는 국어 시간이면 난 거의 수면제를 복용한 것처럼 더 정확히 말하면 병든 병아리 한 낮 햇볕에서 나른히 졸 듯 몽롱하기 일쑤였다. 조용조용히 부드럽게 말씀하시곤 했던 국어 선생님께서 갑자기 약간 열띤 어조로 왜, 서른이 서럽냐고 다짜고짜 물으시는 거였다.
거참, 선생님도, 그때 당시 시인은 서른이 되었을 때 서러웠나 보죠, 뭘 그걸 가지고… 논하시나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국어 선생님께서 대학교를 졸업하시자마자 부임한 첫 학교가 안양여고였고 문제의 싯귀절 “서러운 서른 살”을 가르치실 때 정확히 선생님께선 서른이셨다는 거다. 그래서 그렇게 흥분하셨구나, 뭘 그런 걸 가지고 사내대장부가 쩨쩨하게… 시를 공부해서 그런가? 이름도 잊히지 않는 “송 근덕” 국어 선생님을 언니와 나는 나란히 경쟁하듯 짝사랑했고, 본인은 소신 지원이라며 부인하지만, 언니는 아무래도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선생님의 모교인 고대 국어국문학과를 들어가게 된 것 같다.
정확히 10 년 전 내 생일날이 떠올랐다.
다니던 수원대를 과감히 자퇴하고 노량진 대성학원에서 재수 할 때다. 서울 역에 있는 종로학원 떨어지고, 어쩔 수 없이 노량진 대성학원 다니게 된 날 보고 터프한 우리 언니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야, 서재진~! 그냥 대성학원에서 재수하고 종로대학이나 가라, 너 고 3 때도 종로학원 떨어지고 이번에도 또 떨어지니? 삼수해서 한번 종로대학이나 가지?…”
참자, 참아 언니가 도시락 싸주지만 않았다면, 형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으랴쌰싸아~ 하고 덤벼들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기로 했다.
나를 재수하도록 부축인 것도 언니면서… 치이…
“재진아, 언니가 뒷바라지해줄게, 너 재수해라.”
시골집에서 나와 우선은 지하철이 다니는 안양에서 우린 갈라졌다. 난 수원행, 언니는 청량리행. 언니는 국문학과 아니랄까 봐 말끝마다 소설에서 나오는 “수원댁”을 들먹이며 놀리곤 했다. 마음이 씁쓸했다. 고등학교 축제 때 열심히 연극한 게 그렇게 큰 죄란 말인가? 이과 전체에서 전교 꼴찌라는 것도 하고.. 축제 때 열심히 참가한 것도 다 점수로 환산해 주세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암튼, 내 비록 대성학원 7층 13반에서 재수하고 있지만 언젠가 이 생활 청산하고 봄 날 맞이하리라…
1993년 7월 27일, 그날은 내가 드디어 만 20세 성년이 되는 날이었다. 전 날에도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겨우 아침에 눈 떠보니, 언니도 같이 퍼질러 자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학원 갈 시간이다. 야속했다.
‘아무것도 없나 봐… 내가 비로소 성년이 되는 말인데…’ 언니는 게슴츠레 눈을 반쯤 뜨더니,
“애기야, 언니가 세븐업에 가서 빵 하고 우유 사다 줄게, 잠깐만 기다려~!”
나는 좀 퉁명스러운 말로 대답했다.
“우유는 파스퇴르로 사 와!”
뭐 재수하는 게 큰 벼슬이나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난 매사가 불만스러웠고 항상 언니에게 퉁퉁거렸다.
교실에 앉아서 수업 듣는데 속이 얹잖았다. 언니가 아니라 엄마라면 아침에 최소한 미역국은 있었을 텐데, 언니하고 엄마는 천지차이야, 천지차이.
내 생일날 도시락도 없어서 4교시가 끝나고 집에 가서 밥 먹고 올까, 아님 가까운 분식점이나 식당 가서 사 먹을까 자리에 앉아 뭉그적 뭉그적거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방송에서 낯익은 이름이 들려왔다.
“13반, 서재진 1층 수위실로 빨리 내려오세요.”
누굴까? 혹시 수원대 수학과 친구 녀석 중에 한 명이 장미꽃 20 송이를 들고? 별 상상을 다하며 내려와 보니 집에서 뭘 하다가 왔는지, 대충 옷을 집어 입고 달려온 언니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다시 퉁명한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왜 왔어?”
“오늘, 네 생일이잖아. 언니가 너 따뜻한 밥에 방금 끓인 따뜻한 미역국 먹이고 싶어서 아침에 도시락 안 싸준 거야. 요플레 두 개 샀으니까 친구랑 같이 먹어”
“알았어…”
오늘 학교 수업 있는 것도 자체휴강하고 내 도시락을 직접 싸서 갖다주고 돌아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뭘 가지고 왔나 뒤적거리는데 ‘툭’ 하고 뭐가 떨어진다. 언니가 쓴 쪽지다.
“서러운 스무 살이다. 기쁜 스물한 살이 될 수 있도록…”
내가 있는 교실까지 올라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계단을 오를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꾹 참고 있었는데, 언니의 편지가 그만 나를 터트려버린 것이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니, 방금 압력솥에서 퍼 낸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이 보였다. 미역국도 마찬가지. 불고기는 방금 전 프라이팬에서 구워 담았는지 아직까지도 자글자글하다. 고기만 먹으면 입안이 텁텁하니까 샐러드도 조금 만들어서 담고, 김 하고 김치는 기본. 내가 좋아하는 나물도 있다. 디저트로 요플레에다가 갖가지 종류별로 오색빛깔 아름답게 담긴 과일들…
어제저녁 이걸 준비하다가 고단해서 오늘 아침 늦게 일어난 거였구나…
그런 언니의 눈물 나는 뒷바라지로 난 1 년 뒤 서울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지금은 이곳 미국 코넬까지 오게 되었다. 지금도 엄마 아빠에게 말 못 할 속상한 일이 생기면 언니에게 아침저녁으로 전화 한다. 때로는 푸근한 엄마처럼, 때로는 호랑이 선생님처럼 나를 다그친다. 첫 학기 임시 지도교수에게 말 못 할 모욕을 당하고 다른 지도교수와 장학금을 찾아 방황하면서 거의 한 달간 아무에게 말 못 했을 때도 언니한테 만큼은 이메일을 썼다. 엄마도 막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막내한테 소식 없냐고 언니에게 자주 전화를 하셨단다. 전화하면 그냥 울어버릴 것 같아서 일부러 안 했다. 약한 모습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언니가 내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재진아, 엄마는 이메일을 잘 못하시잖니. 속상한 일 있으면 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식구들한테 다 얘기해. 눈물이 앞을 가려서 걸을 수가 없다니, 이 언니 가슴이 찡하구나. 재진아,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니…”
그런 언니가 내가 미국에 온 후에 어여쁜 딸 규희를 순산하였고, 난 규희가 세상에 나온 줄도 모르고 계속 새벽마다 하나님께 달려가서 우리 언니 순산하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언니는 규희 낳고, 얼굴도 못 보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 내가 생각나서 많이 울었단다. 촉진제를 맞아서라도 규희를 빨리 낳아 내게 보여주고 싶어 할 만큼 나를 생각해 주는 내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언니이다.
내 나이 어엿한 서른이다.
10 년 전 언니가 내게 써준 쪽지처럼 서러운 서른인지 기쁜 서른인지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행복한 서른이다.
아직 젊기에 패기가 서려있고 할 일이 많아 행복한 서른이다. 앞으로 10년 뒤 마흔을 생각해 본다. 그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그리고, 지금보다 서른이 더 보태어진 환갑은? 그땐 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나만의 뮤직 콘서트를 지켜보리라. 피아노 치며, 살아온 얘기 하고, 노래도 몇 곡 부를 거다. 좋아하는 팝 "My Way"와 찬양, 가수 윤 복희님의 ‘여러분’도 부르고 싶다. 그때를 위해 방학 때면 피아노 말고 다른 악기도 차근차근 배워둬야지.
이런 것들 말고, 스무 살 이후로는 내가 내 얼굴을 만들어 간다고 하던데. 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넉넉하고 마음씨 좋은 옆집 아줌마 같은 인상이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지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고 소망을 키워 온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하여 늙고 볼품이 없어진 얼굴이라 할지라도 그 속엔 예수님의 자애로움과 온화함, 사랑을 담은 모습이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