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 14일, 내가 처음 미국 땅을 밟던 날이다. 난 나를 참 스스로 높게 평가했었다. 회화반에서도 내가 제일 영어를 잘하는 것 같은 착각에 자주 빠지곤 했으니까. 종로서적 뒤에 있는 시사 영어학원을 6년 동안 다녔다. 회화와 AFKN은 2년 Time 잡지 강독반은 6년 동안이나 다니면서 얼마나 실력은 늘었는지 모르지만, 내 딴에는 남모르는 자신감과 자만심에 불타있었다. 시사영어학원은 회화코스가 총 5단계인데 마지막 단계만 8개월을 했더니 매달 다른 교재를 준비해야 하는 흑인 Richard 가 하는 말이 “Please, no more…” 그래서 종로 3가 옆건물인 파고다 외국어학원을 갔다. 12 단계와 마지막 Advanced level이 있는데, 단번에 내가 advanced로 가서 난 내 영어가 perfect인 줄 착각했다.
매일 꿈꾸듯 하는 소리가 “제발 나를 미국으로 보내줘~” 였으니까. 하루는 언니가 심각하게 나를 붙잡고 하는 얘기가 “너 하루라도 빨리 미국 가야겠다” “왜?” “너 방금 전에 영어로 잠꼬대하더라, 꿈속에서 뭐 했길래. 또 외국인 만났니?” “어…” 맨날 토플 시험 치르고 나면 이번에도 600 못 넘었다고 나를 구박하던 언니가 이런 말을 할 정도이라니. 난 그야말로 준비된 사람인가 보다 그렇게 스스로 착각하며 행복했었다. 난 미국에 도착하면 내 영어가 “쏴아~”하고 막힌 하수구가 뚫리듯 그렇게 “따따따 다아~” 하고 물 흐르듯이 나오리라 잔뜩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코넬 식당에서 제대로 주문을 못해 이상한 음식을 먹지 않나, 심지어 “for here, to go”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말을 너무 빨리하는 미국인들이 이상해 보였다. 그날 나는 한국에 있는 회화 선생님들에게 이메일을 날렸다. “왜, 한국에서 회화 시간에 말을 그렇게 느리게 했어요~”
지금 유학 2년 차인데도 나의 struggling life 계속되고 있다. 물론 영어 때문이다.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게 영어인 것 같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옛날에는 마구 영어를 했다. 발음에 상관없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외국인한테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네가 못 알아들은 거야…it’s not my fault” 요 근래에도 정말 웃지 못할 실수를 했다. 월요일 새벽기도회가 없는 날은 아무리 서둘러 준비해도 새벽예배 끝나고 가는 날보다 더 훨씬 내 행동이 굼뜬다. 집에서 나올 때 시계를 보니 7시 46분이다. “Oh, my God!” 걷는데 적어도 넉넉히 20분은 걸리는데. 버스운행도 오늘 부로 잠시 중단된 걸로 알고 있는데,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전략질주를 했다. 건물 3층까지 지하에서부터 올라가는데 짧은 내 다리에 무리가 갔다. 교실문을 여니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7시 59분. “흠~ 아무도 안 왔군!” 하며 유유자적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교수도 TA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화학과 비서실에 알리고 교수방에 노트도 남겼다. 뚱뚱한 비서 아줌마와 3층을 무려 3번을 왕복하며 긴급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난리를 쳤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수업 시간표에 “Mon: No class”라고 명확하게 표기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 수업 시간에 “See you next Tuesday”라 했다는데 난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유학하면서 늘은 것은 독학하는 법과 눈치 보는 법. 안 웃겨도 그냥 웃어주고, 이해 못 해도 “Aha~” 하면서 장단 맞춰 주는 것. 그래도, 외국인이 날 쳐다보면 “아뿔싸~ 나한테 뭐 물어봤나 보구나~” 하면서 “What did you say?” 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암튼, 그날 난 무척 좌절했었다. 내 영어에 관한 오만함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하지만 난 ironic 하게도 자신감을 얻었다. “다음부터는 수업 전날에 꼭 수업시간표를 봐야지. 그러면 다시는 이런 실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꼭 수업이 끝나면 See you ( -day)를 확실하게 들어둬야지. 수업 내용은 못 이해했다 하더라도.”
요즘 자신감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새롭게 내렸다. 자신감이란 수없이 넘어지고, 부딪치면서 깨닫는 것. 단번에 얻어졌다면 내가 대단해서 된 줄 알고 착각하는 자만심이 길러졌었겠지. “이 길은 참 험하구나, 다음번엔 다른 길로 돌아가야지…” “이렇게 걸으니까 자꾸 넘어지네, 다른 방법으로 걸어야겠다…” 하며 해진 무릎으로 나아가는 것, 넘어져도 흙 털고 일어나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것, 지금은 고단하고 힘들어도 나를 믿고 다독이는 것이 내가 정의하는 자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