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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정 Sep 13. 2021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렇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싫어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지 익히 경험했기에, 좋아하기까지는 못 가더라도 좋지도 싫지도 않은 평온한 마음을 지니고 싶어 얼마간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런 자기 파괴적인 감정(혐오의 시대라 할 만큼 타인을 향한 부정적 태도가 도처에 깔린 세상이지만, 이 오의 감정에 풍덩 빠져 바닥까지 닿아본 이는 안다. 남을 미워하든, 나를 미워하든, 결국 파괴되는 자는 자신일 뿐이라는 것을.)은 한번 자리를 잡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기가 알을 까듯 기하급수적으로 재생산 되기에 되도록 빨리, 서둘러 내 안에서 밀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실패한 듯 하다. 주말 사이 틈틈이 그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 이건 아니다. 이러고 싶지는 않다.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그에게 내어줄 마음이 나는 진정 없단 말이다!     


좋은 상담사란, 자격증으로 설명되지도 않고, 이론으로 중무장한다고 해서 닿을 수 있는 경지도 아니라는 것을 상담을 받아 보고 또 해보며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결국 뻔한 이야기지만 성숙한 인격, 포용력, 지혜를 기르는 것이 좋은 상담사가 되기 위한 과제이다. 이 과제는 물론  죽을 때까지 끝내지 못할테지만. 백두산처럼 거대한 과제는 미뤄 두자. 눈앞의 작은 과제만으로도 버겁다. 지금 나에게 닥친 숙제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좋아하기 전에 한 번 더 신중하기.> 나는 너무도 쉽게 상대를 향한 호불호의 감정을 단정 짓는다. 내가 뭐 그리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짧은 시간에 경솔하게 판단하고는 끝이다. 그렇게 한 번 싫은 사람은 왠만한 사건이 있지 않은 한, 오래도록 그냥, 딱 싫다. 야박하게도 여간해서는 되돌릴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고집스러움은 내담자를 향해서도 작동하는데, 첫 만남에서 바로 내 마음엔 그를 향한 호감과 비호감이 선언되고 만다. 와중에 다행인 것은 나는 대체로 호감 쪽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은 가지고 있다는 것. 단숨에 비호감을 선언할만한 태도, 말투, 행동 안에서 숨겨진 불안을 쉽게 포착하기도 하는데, 그 순간 나의 감정은 호로 바뀌고 만다. 연민의 애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에 불호를 선언케 하는 이는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상담 시간은 나와의 싸움이 되고 만다. 마주 앉은 그를 향해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그의 입장과 태도를 한껏 취해보며 공감해야 하건만, 도무지 그럴 의지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 안에서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걸고 넘어가고 있다. ‘그런 식으로 말하니 주변에 사람이 없지, 쯪쯪.’, ‘저런 사고방식이라니, 내 가까운 이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저 철옹성 같은 자기방어의 막을 뚫을 수 있는 상담사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까지.

      

<상담 신청 이유> 칸에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적는 사람이 대부분인 만큼, 상담의 작동 원리는 사실 관계맺기에 다름 아니다. 상담자와 내담자가 바깥 세상에서 경험하는 관계 양상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관계 형성의 경험을 상담실에서 해보는 것. 그래서 바깥에 나아가서도 상담자와 관계 맺었던 대로,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기를 실천해 보는 것.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내담자에게 제공되어야 할 관계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지지의 관계.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따뜻한 포용의 관계이다. 그런 관계를, 싫어하는 이에게 내가 제공할 수 있느냐고? 물론, 없다. 나는 너무도 불완전하고, 미성숙하고, 불포용적인 상담사 지망생으로,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한다면, 지금 막 돋아나는 싹이 누런, 슬픈 새싹이란 말이다.      


이번에 그는, 나의 내담자는 아니니 다행이다. 사람 한 명 망치면 안 되니까. 문제는 더 크다. 매일 봐야 하는, 내 일터의 사람이다. 처음 한 달은 ‘이것이 내가 상담사로서의 자질을 키우는 데 있어 통과해야 하는 거대한 숙제다.’ 주문을 외웠다. 내가 싫어하는 이에 대해서도 포용력을 갖고 이해하려 노력하기. 실전 연습이다! 그 한 달이 1년보다 길었다. 이제는 포기를 선언하고 나가 떨어지기 1초 전.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무섭도록 확인하며, 자괴감만 드높아진 한 달이었다.     


아나운서로 10년을 넘게 살면서 내 사회적 페르소나는 주로 ‘착한 사람’이었다. 타인의 나에 대한 평가는 뭉뚱그려진 표현으로, ‘착하다’인 경우가 많았다. 이 시대의 ‘착하다’의 정의가 어떻게 내려지는지에 대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겠다. 다만 나에게 쓰인 이 표현을 간단히 정리 해 보자면, 나는 ‘여간해서는 누군가와 갈등을 표면화하지 않는 사람’ 정도로 말할 수 있을 듯. 편한 이에게 다른 이의 험담을 좀 할라치면, ‘어머, 너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어?’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의 사회생활은 그랬다. 그럼 내가 정말 인류애 넘치는 유형의 사람이냐고? 오우, 노. 나는 그저 개인의 호불호를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게 나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익숙한 사회생활의 일환이었다. 내가 그를 싫어할지라도 굳이 그에게 그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다. 그저 슬쩍 거리를 두는 것을 충분하고, 그게 옳다고 느껴왔다. 그런 내가 이렇게 시험대에 오르게 되다니!     


그를 향한 나의 이 감정이 당혹스럽다. 나의 악랄한 마음은 이렇다. 나는 그에게 굳이 나의 차가운 惡의 감정을 숨길 의지가 없다. 숨기지 않는 것을 넘어 어느 순간엔가는 그가 나의 이 감정을, 조롱하는 이 마음을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싫어하는 그가, 나의 惡 감정을 읽기를, 읽고 마음이 크게 할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런 나의 감정을 확인하는 것이 버겁다. 상담을 하면서, 아니 그냥 살면서 늘 깨닫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의도 없이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또 받느냐 하는 것인데, 나는 오늘, 다분한 의도를 담아 그를 향한 나의 감정을 말없이(말보다 더 확연하게) 분출하고 말았다. 그의 이야기에 절대로 호응하지 않는 것부터 해서, 눈맞춤하지 않고 말하기, 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떨어져 앉기. 그럼으로 해서 나의 마음이 후련해졌느냐고? 반대다. 나는 그에 대한 혐오감에 더해, 이렇게 미숙한 방법으로 밖에 대응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혐오감을 얹어, 정말 형편없이 불쾌한 마음을 이렇게 타닥타닥 쏟아내고 있다.     


이 글을 어떻게 맺을지 난감하다. 이왕이면, 그래도 어찌저찌해서 마음을 달리 먹을 방도를 찾았다거나, 혹은 뜻밖의 어느날, 우연찮게 그의 눈이 번쩍 뜨이는 장점을 발견하고 그를 미워한 내가 틀렸음을 뼈 아프게 깨달으며, 이젠 사람을 속단하지 않겠다며, 나의 숙제를 완수할 그 첫 단추를 끼웠다거나 하는 해피엔딩적, 드라마틱한 결말이 필요한데,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은 이런 결론 없는 글들이 어설픈 제목이 붙은 채 <미완> 폴더를 꽤 채우고 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고, 남의 마음을 깊이 이해한다고 느끼는 순간을 쌓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때도 있건만, 나의 문제를 들여다 봄에 있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 꼬인 마음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자고로 스님도 자기 머리는 못 깎는다는 것을 상기하며 자위할 밖에.

      

보통은 이런 경우, 투사에 대해 고려해 볼 만 하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실은 그에게서 나의 부정하고 싶은 면을 발견해서 일수도 있다. 일테면, ‘잘난 척하는 이는 딱 싫어!’라고 외치는 내면에는 잘난 척하고 싶은 욕망에 몸부림치는 내가 있다는 것. 이 시도는 정말 힘들다. 그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느니 차라리 차가운 한강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만큼 거부감이 든단 말이다. 그러므로 이 과제는 이렇게 마침표 없이 내 머리 한구석을 오래도록 점령할 예정이다. 다만 이 과제는 장기 프로젝트인 거라고,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 거라고, 그래도 아예 놓지는 않고, 언젠가는 다시 붙잡고 끙끙대며 실마리를 풀어 보겠노라 다짐하는 밤. 오늘은, 밤이 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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