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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Jul 05. 2020

음악치료사의 코로나 극복기 1

코로나에 걸리는 조건

나는 뉴욕시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음악치료사이다. 3월 초, 본격적으로 중순부터 미국에 전역에 코로나 바이러스 비상사태가 알려졌다. 3월 중순 뉴욕에 봉쇄 명령이 알려지고, 3월 22일을 기준으로 뉴욕시를 포함한 뉴욕주 전체에 내려진 락다운 조처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전, 6월 8일, 멈춰있던 뉴욕은 4단계로 이뤄진 뉴욕주의 경제 정상화 중 2단계에 진입했고 얼마 후 3단계도 진행될 예정이다. 나는 얼마 전 (6월 19일) 음성 판정을 받으며 3개월 동안의 기나긴 코로나와의 싸움을 이겨내고 확진자의 고통과 슬픔,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다. 참고로 나는 42.195km 풀 마라톤을 보통 기록으로 완주했을 정도로 건강함 빼면 시체인 튼튼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걸 알고 정말 놀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 안 걸릴 줄 알았다.


내가 일하는 병원은 요양 및 재활시설이라서 대부분 노인분들이 지내고 있기 때문에  코로나 19가 퍼진다면 면역력이 약하거나 당뇨 및 폐질환이 있으면 합병증으로 아주 치명적이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게다가 무증상인 스태프 및 방문자들을 통해 언제 어떻게 확산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3월 13일부터 내가 일하는 병원에선 건물에 들어서면 손을 소독하고 설문지에 이름과 부서를 적은 후 4가지 질문에 예 아니요 칸에 체크 (예를 들면 고열이나 최근 해외에 다녀온 여부), 그 후 일회용 마스크를 하나 챙기고, 간호조무사가 열을 잰다. 온도를 재는 기구는 단 하나로, 플라스틱을 끼워서 입 안에 넣었다 빼고, 플라스틱은 버리고 그 기구만 쓱 알코올로 닦아서 쓰고 또 쓰는데 충격이었다 (온도 재다가 코로나 걸릴 각). 정상 체온이 나오면 마스크 착용 확인 후 들여보내 준다. 번거롭지만, 건물을 나갔다가 들어오면 무조건 해야 하고 마스크는 밥 먹을 때 제외하고 하루 종일 착용해야 한다. 쓰다 보면 머리가 아프다.




나는 뉴욕 시안에 있는 퀸즈카운티에 살고 킹스 카운티에서 일하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면 시간이 대략 1시간 20분 걸린다. 출근길 7번 지하철은 그야말로 뉴욕 지옥철의 끝판왕이라 (나 포함 모든 사람들이 미식축구 선수가 된다) 정말 웬만하면 피하고 싶다. 자가격리, 락다운이 내려진 상태이지만, 미국 전역에 의료계 종사자 및 필수인력은 변동 없이 싫든 좋든 출근을 해야 한다. 의외라고 생각되겠지만, 음악치료사 및 예술치료사 직업도 병원에서 일하면 필수인력이기 때문에 출근해야 한다. 운 좋은 음악/예술치료사들은 일하는 기관 디렉터의 결정에 따라 자택 근무를 한다고 들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중국에서 시작됐다는 이유로 수많은 동양인들이 공격당한다는 뉴스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내가 아는 사람들도 포함).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 피해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말로 시비를 걸으며 공격을 해오는데, 몇 번은 맞받아치다가, 혹여나 신체공격을 당할지 몰라 무시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어깨를 두드리거나 내 앞에 떡하니 와서 짖어대는 그들을 어찌 피하랴. 그렇게 몇 번의 충격으로 인해 출퇴근마다 더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면역력은 떨어져 갔다.


직장은 이직한 지 겨우 3개월 된 곳이라, 적응 단계에 있었고, 일은 일대로 많고, 부서 사람들의 텃세와 기싸움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나는 병동 2곳, 총 80명의 사람들을 맡으며 하루에 집단 음악치료는 오전 오후에 2개 (세션은 1시간), 개인 음악치료는 2-3명인데,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면 첫 진단을 해야 하고 병원에서 쓰는 2개의 프로그램에 정보를 입력하고 문서작업을 해야 한다. 어디서나 그렇듯이 문서를 기록하지 않으면, 하지 않은 걸로 치부되기 때문에, 서류 작업은 필수적인 것과 더불어 증거자료이다. (서류 작업이 환자를 본 시간보다 더 걸리는 건 왜일까) 내가 맡은 병동 한 곳은 특성상 입원하고 퇴원하는 사람의 회전율이 빨라 다른 치료사들에 비해 더 바쁘고 일이 많았다 (제일 신참인 내가 힘든 일을 맡아해야지).


3월 중순부터 비상사태에 돌입, 모든 예술치료 및 레크리에이션 그룹과 행사들은 중단됐지만, 10명 내외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그 와중에 모든 치료사와 스태프들은 플랜 B로 사람들이 방 안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여가활동 재료들을 준비하기 바빴다. 병원에서 유일한 음악치료사인 나는 다른 치료사들 보다 더 유용하게 쓰였다. 음악이라는 특성상, 직접적인 접촉 없이도, 복도나 열린 공간에서 라이브 음악을 제공할 수 있고 거리를 유지하며 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른 치료사들은 재료를 나눠주고 자신이 맡은 병동마저 방문을 최소화할 때, 나는 모든 병동을 돌며 (총 8 병동, 총 320명 수용 가능) 일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검사 키트가 없어 누가 걸렸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사람들의 방마다 멈춰서 소통하고 노래도 하며 병동 복도를 누비고 다녔음에도 사람들 방안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한 소리 들었다. 결국,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들어갔는데도, 장갑을 껴서 사람들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고 한 소리 들었다. 장갑을 빼고 사람들의 방을 들어오고 나갈 때 일일이 손세정제를 쓰거나 계속 씻는 번거로움을 했다. 마스크 끼고 노래를 부르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복면가왕을 1시간 내내 한다고 생각해봐라).   마스크로 인한 두통과 피부 염증은 덤. 솔직히 뭔가 억울했다. 원래 다른 치료사보다 일도 많은 데다가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해도 이런저런 트집을 잡는 상사가 불쾌하고 괘씸하고 화가 났다. 이쯤 되면 상사가 micro management보다 더한 nano management 하는 사람이라는 건 말해 뭐해. 입만 아프다. 전 직장에선 일은 많아도 혼자서 자유롭게 일해서 굉장히 만족도 높고 행복했다. 더 나은 미래와 목표를 위해 입사한 것인데 골로 가는 지름길을 택한 격. 위에 언급했듯이, 코로나 이후 저격당한 동양인 피해자가 된 이후 출퇴근길마다 패닉 어택과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했다. 스트레스는 심해지고 또 환절기 끝자락과 겹쳐 몸 상태도 안 좋아졌다. 그렇게 나는 본의 아니게 코로나가 기생할만한 모든 조건을 충분히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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