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악치료사 Jul 05. 2020

음악치료사의 코로나 극복기 2

발열 & 열 받음

첫 증상 (화씨 102.8도 = 섭씨 39.3도)

때는 3월 말, 환절기에 접어들어 기온이 들쑥날쑥 심했다. 금요일 화씨 75도까지 올라간 초여름인 듯 초여름 아닌 초여름 같은 날. 하루 종일 알차게 놀았다. 그날따라 너무 피곤한 나머지 샤워를 하고 머리를 안 말린 상태에 얇은 담요를 덮고 잠이 들었다. 하필 그날에 친한 가족 집에 있었는데, 새벽에 2시쯤 세상 처음 느껴보는 근육통과 오한과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스러움에 잠에서 깼다. 두꺼운 이불을 찾아 덮고 다시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에 열이 장난 아니게 올라있었다. 발열은 하루 종일 99.7~102.8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머리를 말리지 않고 춥게 자서, 당연히 감기 기운인 줄 넘겨짚고, 절대 코로나라는 생각은 1도 하지 않았다. 놀러 간 가족 집 언니가 밥도 잘 챙겨주고 타이레놀과 더불어 좋은 거 다 넣고 끓인 생강차를 계속 마셔주며 urgent care (긴급치료센터?)에 가지 않고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미술치료사인 한국인 직장 동료에게 얘기를 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발만 동동 굴리며 걱정했다. 체온기로 30번은 넘게 온도를 측정을 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열을 쟀을 때는 정상으로 나와 출근을 했다. 오한, 근육통, 머리아픔은 계속되었지만, 쓸데없는 불굴의 의지로 출근했다. 병원 로비에 도착해서 열을 쟀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정상체온으로 나와서 평소처럼 일을 했다.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몸도 너무 아프고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난생처음 겪는 몸살 근육통과 두통이었다. 내 근무요일은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인데, 일요일날임에도 감시 겸 출근한 상사가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은 내게 마지못해 안부를 물었다. 내 증상을 비롯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오늘은 열이 없으니 나아지겠지"라고 했다. 덧붙여, 별거 아닐 거라며 넌 괜찮을 거란 심심한 말을 끝으로, 결국 아픈 몸으로 초인적인 정신력과 투혼을 발휘해 일을 마무리했다.


퇴근 후, 입맛은 없었지만 타이레놀을 먹기 위해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이 새로운 레벨의 몸살감기 증상이  없어지길 바랬다. 바람과는 달리, 다음날도 아픔은 지속됐지만, 열이 없으니 출근을 감행했다. 몸이 아파서 그런지 입맛도 없었다. 그래도 일이 힘드니 꾸역꾸역 밥은 먹었다.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프니까 입맛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몸은 쉬라고 내게 신호를 보냈지만, 눈치가 보여 쉬지 못한 채, 일주일이 지나갔다. 2주째가 되었을 때, 후각과 미각을 잃은 것이 확실해졌다. 원래 라면을 좋아하지만 아플 땐 자제하며 건강식으로 먹는데, 후각 미각을 시험해보기 위해 일부러 라면을 먹었는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라면 맛이 안 난다. 무언가 처음 접하는 조미료 맛이었고, 물도 굳이 표현하자면 미네랄 맛이랄까. 원래 알던 느끼던 맛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고 라면의 강력한 냄새도 없었다. 순간 공포가 밀려왔고, 내가 단순히 입맛이 없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렇게 코로나에 관한 무증상과 더불어 미각 후각 기능 상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있다는 기사들이 꽤 나왔다. 그 당시 미국엔 그런 증상들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언급했을 때도 내 부서 사람들은 내가 지금 스트레스받고 예민하기 때문이라며 내가 유난 떠는 사람인 양 취급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며, 몸의 이상 신호들을 감지하되, 심각성을 무시하며 증상들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다 내 몸은 지쳐버렸다. 그렇게 적신호는 계속되었고, 미팅 때 극심한 오한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 날 긴팔을 입었었고 안에 내의까지 입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을 보니 반팔을 입은 사람도 있고 추워하긴 커녕 오히려 더워했다. 이상을 느낀 나는 잠시 열을 재고 온다 하고 내려갔다. 직원 건강을 담당하는 오피스엔 사람이 없었다. 이 시기에 많은 직원들이 직장에 안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로비에 있던 간호조무사를 통해 열을 쟀는데, 정상으로 나왔다. 몸이 오한을 느끼고 이상하다고 얘기하던 중 높은 직위의 간호사분이 다가와 괜찮냐 물었고 대충 내 상태를 설명했다. 열이 없으니 그냥 오피스에서 스웨터를 챙겨 다시 미팅으로 가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곤 여벌로 쟁여 둔 바지와 상의를 더 껴입고 미팅을 마저 하러 갔다.


발열보다 더한 열 받음

그 후, 5분이 지나서 상사가 성난 얼굴로 나에게 나오라고 손을 까딱였다. 별로 나가고 싶진 않았지만 내 물건을 다 챙겨 미팅을 끝내지 못한 채 나갔다. 그러고선 성난 목소리로 "너 아파? 아침에 멀쩡했잖아?" 그러면서 황당하단 식으로 화를 낸다. 왜 자기를 당황하게 하고 다른 부서 사람이 찾아오게 하냐며 다그쳤다. 아니, 내가 갑자기 이렇게 심한 오한에 몸서리칠 줄 알았나? 이 상사는 내가 직장에 있을 때, 화장실 가는 것 포함해서 분, 초 단위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얘기해줘야 하는 식으로 요구를 한다. 상사는 원래도 불안정하고 일관성 없는 사람이라 독립적으로 일하는 걸 선호하는 나에겐 같이 일하기 굉장히 피곤하고 힘든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가 스트레스 안 받고 배겨. 난 침착하게 설명을 하려 했지만,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냥 다짜고짜 병원장에게 날 데려갈 것이라고, 알아서 얘기를 하라고 했다.


난 오히려 잘됐다 생각하고 병원장에게 내 증상들을 나열했다. 나는 어쩌면 코로나에 걸려있는지 모른다고. 그러자 병원장은, 모든 스태프들이 무언가 걸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네가 무언가 걸렸더라도 지금은 회복 중일 것이라고. 그러니 환자 접촉은 최소화하며 마스크를 쓰고 계속 일을 하라고 했다. 솔직히 당황스럽고 정말 황당했다. 노인들이 많은 병원에, 게다가 병원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감염관리에 안일한 태세를 취한다는 것이 과연 병원장이란 지위를 떠나 의사자격이 있는가란 생각과 배신감마저 들었다. 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이미 옮겼거나 옮기고 다니고 있다는 걱정들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나는 정말 휴식이 필요한 상황..) 오피스로 돌아가서 상사와 오해를 풀기 위해 대화를 했는데, 나갈 땐 둘 다 언성이 높아져나갔다. 대략, 상사는 내가 꾀병 부리는 것이 아니냐, 혼자 별거 아닌데 오버를 떨며 드라마를 만들다, 깊은 물에 빠진 것도 아닌데 혼자 허우적거리며 난리 친다는 둥 별의별 비꼬는 비유들을 나열하며 나를 공격했다. 거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나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그리고 "나랑 더 이상 장난할 생각하지 마. " 등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픈데도, 그 억지스러운 말을,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는데도 끝까지 듣고, 내가 말할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렇게 내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서, 반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내 말을 막는데, 나도 언성을 높여 말을 했다. 지금은 기억도 안 난다. 대략, "나를 못 믿는다는 건 유감이지만, 나는 검사를 하고 싶어도 검사해주는 곳도 없고, 아파도 열이 없으니 계속 나와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일을 더하면 더했지 덜한 사람이 아니다" 등등 속 시원하게 할 말을 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선 가장 바쁜 병동에서 일하고, 지금 시국에 쓸모 있고 평판 좋은 나를 '자르려면 잘라봐라, 너만 손해지'라는 생각으로 막무가내로 나갔다.


그렇게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같은 부서 사람들은 새로 온 지 겨우 3개월이 안된 내가 부서 디렉터인 상사에게 고함치며 맞선 나를 토끼눈으로 쳐다봤다. 속으로, '자, 봤지? 내가 여기서 가장 어리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나를 휘두르거나 하지 마라, 내가 이 구역의 미친 X이다.' 그렇게, 점심시간 때 나를 경계하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부서 사람들이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그들도 속으로 통쾌했던 모양이다.




나는 환자들과 직접적인 접촉은 아니지만 방을 드나들며 계속 일을 했다. 그렇게 쉬어야 할 골든타임을 놓치고 일을 하다 증상들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심해졌다. 그렇게 병원에서도 확진자가 생겨났는데도, 투명하게 알리지 않고,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한 병동은 2-3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봉쇄한다고 했음에도, 나는 가운 등을 입어서라도 방문을 하라고 지시받았다. 어처구니없었지만, 우리 간호사들이나 간호조무사들 다 그렇게 하기에, 의아하겠지만 "필수업"에 속한 음악치료사는, 부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바쁘게 모든 병동을 돌며 일을 했다. 악바리로 버티던 나는, 딱 발열 2주째가 되던 날 기운이 없었다. 주말에는 내가 부서를 진두지휘하는 사람인데, 부서 사람들이 나에게 상태가 말이 아니라며, 아픈데 왜 나왔냐, 자신들의 건강과 안위를 생각도 안 하냐며, 바로 집으로 가라고 다그쳤다. 이 날은, 내가 호텔로 입실하는 날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출퇴근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지하철엔 수많은 범죄 및 노숙자들이 난무했고, 많은 사람들이 최악의 모습을 드러내며 출퇴근길은 어느 때보다 위험했다. 그렇게 나는 직장의 배려로 병원 근처에 호텔을 잡았다. 호텔 입실 날이 내 첫 증상 딱 2주가 되었을 때였다. 편리함과 안도의 한숨은 잠시, 한 달 정도 예약했던 호텔에 내가 출근 한 번 하지 않고 8주 동안 머물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음악치료사의 코로나 극복기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