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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Jul 17. 2020

음악치료사의 코로나 극복기 4

뉴욕 확진자의 발열 후 충격적인 열흘 간의 동선

발열 후 열흘 동안의 충격적인 동선을 공유해 본다. 그 당시 코로나일 거란 생각이 전혀 없던 건 아니지만, 보통 며칠씩 지속되는 열도 아니었고, 오락가락했지만 증상은 하루하루 호전되었기에, 단순히 심한 감기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내 심증은 피곤함과 무신경에 가려진 채, 확진자라는 가능성을 닫아버렸다. 오락가락하는 증상 때문에 호전돼 결국 열흘이 지나서야 확진자가 아닐 거란 확신은 내 착각이자 희망사항으로 확정되었다.


내가 첫 증상 이후 열흘 동안 발열이 나타난 곳, 즉 주말에 놀러 갔던 언니네서 쭉 지냈다. 갑자기 아프기도 했지만, 평소 잘 챙겨 먹고 다니지 않는 나를 생각해서 배려해주었다. 언니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남편과 아들 둘이 있었다.  내가 뉴욕 정착할 때 10개월 간 함께 살기도 했었고, 오랜 시간 함께한 나의 소중한 가족이다. 그렇게 코로나 사태로 언니와 형부 둘 다 일을 못하게 된 상태이다. 맨해튼으로 지하철이 아닌 두배 비싼 기차를 타고 출퇴근하던 형부의 교통카드는 내 것이 되었다. 덕분에 내 자취방에서 출퇴근하는 시간이랑 차이가 없고 더 좋은 환경이라 나에겐 이득이었다.  그렇게 의식주는 다 해결되었고, 유일하게 병원에서 일하는 나는 출퇴근하였다.


토요일 (1)

첫 증상은 토요일 새벽 2-3시 즈음 나타났다. 하루 종일 언니의 보살핌 속에 잘 먹고 열은 지속되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거실에서 예능이나 드라마도 보고 그랬다. 최대한 차분하게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려 노력했고, '나는 아프면 안 돼, 빨리 나아야지'라고 되새겼다. 집에는 언니와 형부 그리고 9살, 3살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이 날은 머리를 다이슨 드라이어로 잘 말리고 잤다.


일요일 (2)

이튿날, 다행히 열은 없지만, 기운이 없고 오한과 몸살, 머리가 깨질 듯 아파서 하루 쉬었으면 좋겠다 생각하지만, 주말엔 부서 책임자로 출근을 안 하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 (후폭풍이 더 싫기에...) 투혼으로 출근. 차라리 출근해서 열을 쟀을 때 열이 나서 집에 보내지는 걸 최고의 시나리오라 생각함.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정상 체온이 나와서 일을 감행. 날 검사해준 간호조무사는 병원에서 나눠주는 얇은 마스크와 장갑 외엔 보호장치가 없었고, 검사 방식은 이 전 글에 올린 것처럼 일회용 플라스틱을 기구에 끼워서 입안에 넣어 온도를 측정하는 (위험천만한) 구식으로 진행되었다.


하루 종일 언니가 새벽부터 챙겨준 생강과 온갖 좋은 걸 넣고 끓인 물이 담긴 보온병을 들이켰다. 다행히, 병동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지시가 있어서, 오피스안에서 서류 작업만 했다. 우리 부서에 한 명은 병가를 냈고 나를 포함해서 총 3명이 출근을 했다. 오전엔 컨디션이 좋아져서 언니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는데, "어제부터 언니가 고생많았옹ㅜㅜ 덕분에 감기 기운 싹 나았옹!!!"이라고 보냈다.


내 동선은 집-기차-지하철-병원 그리고 돌아오는 건 똑같다. 지하철 안에서 어떤 아줌마가 내 어깨를 건들며 코로나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동양인 비하 발언을 했다. 나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우선 집에서 기차역까지 5분 정도 걸어간다. 기차를 타고 종점인 펜스테이션 (Penn Station) 역에서 내린 뒤,  빨간색 노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주말에는 노선이 바뀌는데 빨간 노선이 초록색 노선으로 바뀌어 운행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내려서 대략 1.6km를 걸으면 병원에 도착한다. 참고로 펜스테이션 역은 뉴욕의 중심지 중 한 곳이기 때문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보니 형부가 하루 종일 열이 나고 아프단다. 순간 너무 놀라서 당황했고, 나에게서 옮은 건가, 그런 여러 가지 불편한 마음과 뒤 섞인 죄책감이 들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저녁을 먹고 타이레놀을 먹고 잤다. 다음 날은 나아지길 간절히 기도하며...



월요일 (3)

셋째 날, 그 전날보다는 나아진 상태로 안도의 한 숨을 쉬며 출근. 형부는 열이 계속되었다. 다행히 우리 부서는 병동에 올라가지 않았다. 내 병동은 늘 그렇듯, 새로 온 환자들이 많이 있어서 서류 작업이 많았지만, 환자 대면을 하지 않은 채 병원 내 전자 의무기록 (electronic medical record)에 나와있는 의료정보로만 서류 작업을 완료했다. 병동 출입을 막은 덕분에 어쩌면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 부서엔 총 12명의 직원들이 열린 오피스 공간에서 일을 했고, 점심때 나는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출되었을지 짐작도 안 간다. 참고로 우리 부서는 부장 한 명과 간호조무사가 5명이 포함되어있는데, 솔직히 그 들이 왜 이 부서에 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 외, 나와 미술치료사, 레크리에이션 치료사, 자격증 없는 치료사처럼 일하는 케이스 워커 (case worker), 수녀님, 목회자가 함께 일한다.    


화요일 (4)

넷째 날, 여전히 피곤했지만, 원래 겨울엔 (3월 말이었지만) 유독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날도 춥고 나가기 싫고 몸이 찌뿌둥하고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출근했다. 부서 사람들은 모두 분주하게 환자들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여가활동 패키지를 준비하기 바빴다. 몸이 기력이 없고 피곤했지만, 감기는 일주일 정도 가니까, 열도 없는 나는 회복 중이라 생각했다. 코로나 사태로 치료사들도 병동에 올라가는 걸 막았지만, 음악치료사인 나는 예외였다. 누가 봐도 상태가 별로인 나에게 이 시국에 집단 음악치료를 하라고 올려 보냈다. 노래를 잘하는 간호조무사와 함께... 너무나 어이가 없었지만, 치료사 중 유일하게 나는 올라가서 일을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환자들과도 직접적 접촉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해서 오히려 좋았지만, 걱정은 됐다. 병원의 안일한 대처와 우리 부서의 뭐라도 바쁜척하려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화요일은 퇴근 후, 방문치료가 있는 날이다. 내가 직접 집에 방문해서 개인 음악치료를 한다. 집에 가는 길에 있어서 피곤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45분 하는 거라 큰 무리는 없다. 코로나 사태로 이어갈지 말지 고민을 했는데, 모든 학교나 시설들이 문을 닫은 상태라, 나까지 방문을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보통 신발을 신고 다니지만, 집 안에 들어서면 신발을 벗고, 화장실에서 1분간 손을 빡빡 씻은 뒤, 날 위해 준비해 둔 수건으로 닦고 마스크를 착용한 채 세션을 했다. 그렇게 평소대로 일정을 소화하고 언니네 집으로 갔다. 형부는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셨다.


수요일 (5)

닷새가 되었다. 출근길에 혐오 발언을 듣고 굉장한 패닉 상태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열을 잰 후, 긴장이 풀리자 다리마저 풀려버려 그대로 쓰러질 뻔할걸 근처에 있던 직원들의 도움으로 로비 의자에 앉았다. 나는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동안 쌓여온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나를 정신과 검사받으라고 보내려던 걸, 나 조금 있으면 진정될 거라고... 안 가면 안 되냐고 아침에 있었던 얘기와 그동안 출퇴근길에 있었던 고충을 털어놓았다. 뉴욕 지하철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고, 미친 사람들 역시 너무나 많다. 뭐 미쳤다기보단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라, 그렇게 표출하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지극히 정상일 수도...

그렇게 오피스안에서 서류 작업도 하고 나는 병동으로 올라가 거리를 두며 음악치료 세션을 했다. 몸은 피로하고 오한도 있고 머리도 여전히 깨질 듯이 아팠지만, 열이 없으니.. 차라리 다시 발열되길 바랬다. 그만큼 나는 휴식이 필요했다. 형부는 여전히 고열에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지만 호흡곤란도 없었고 응급실에 갈만한 상태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코로나 검사를 받고 싶어도 검사 키트가 모자라기 때문에 집에서 격리하라는 의료진의 통보만 받았다.


목요일 (6)

6일째 되는 날, 이 날은 금요일과 같은 격이라, 주중 출근하는 마지막이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몸은 피로감을 제외하면 괜찮아졌다. 이로써 나는 역시 코로나는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쉬는 시간 때 틈틈이 친구와 문자를 하고 내 근황을 전했다. 내 상황을 들은 친구는 다짜고짜 일하는 곳 주소를 달라며,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친구가 날 태우러 왔다. 당분간 쉴 수 없는지 걱정해주며, 여러 가지 의논 사항도 있었기에. 원래대로라면 우린 다음 날 만나야 했는데, 그렇게 서로 귀찮음으로 내일 약속을 취소할까 말까 고민했었다는 얘기를 터놓으며, 나도 그냥 취소하자라는 말이 목구멍에 차올랐지만, 이번이 아니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몰라서 예정대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친구의 남편도 퇴근 시간이라 친구가 픽업했다. 오랜만에 인사도 하고, 언니네 집까지 편하게 차를 타고 갔다.


금요일 (7)

7일째 되는 날, 나에겐 주말이라 늦잠도 자고 오랜만에 대학 때 가장 친했던 친구들이랑 모이기로 했다. 지난 6일 내내 일하고 또 몸도 안 좋았던 터라, 쉬고 싶었지만, 이 날은 컨디션은 좋았다. 감기 기운은 다 사라진 느낌이었다. 아팠다면 취소했을 것이다. 어제 병원까지 와서 집에 데려다준 같은 친구의 차로 이동했다. 뉴저지에서 혼자 자취하는 친구를 위해 한인마트에서 이것저것 장을 봤다. 가는 도중 차멀미를 해서 몸이 좀 힘들었지만, 차가 많이 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언니네서 잘 먹고 다녀서 살이 쪘는지, 옷이 꽉 껴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친구네 집 가자마자 친구 바지랑 후디로 갈아입었다. 밥그릇과 국그릇 외엔 모든 음식을 나눠먹었고, 심지어 다른 친구는 내가 남긴 커피까지 다 마셨다. 식사 후, 밖에 나가 동네를 산책했다. 그리고 친구랑 나 잡아봐라의 과격형으로 뛰어다니며 친구의 궁둥이를 걷어차기 바빴다. 그렇게 놀다가 언니네 집으로 돌아갔다. 컨디션이 좋았던 이 날은 9살, 3살 동생들과 기타 치며 놀았다. 형부는 여전히 열이 내려가지 않으셨다.


토요일 (8)

열심히 잘 먹고 다녀서 그런지 주말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상태는 호전된 느낌이지만, 뭔가 발열 전의 몸상태는 아니었다. 오한도 감돌고, 머리도 아프고 기력도 왜 이런지 알 수없었지만, 최대한 정상적인 생활을 했다. 밖에 나가려고 상의를 겹겹이 껴입었는데, 나가보니 추운 느낌이라 하의까지 위에 다 껴입고 겨울 재킷으로 무장한 채 밖으로 나갔다. 근처 마트에 나가서 쇼핑도 하고 피자도 픽업하러 가고 밖에 돌아다녔다. 비 오는 날이라 사람이 북적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뒹굴며 아이들과 놀고먹었다. 언니와 아이들은 건강했지만 형부는 열에 시달리며 나아지지 않았다. 거실에서 마스크를 끼고 있던 형부는 아예 격리에 들어갔다.


일요일 (9)

9일째 되는 날, 일요일 다시 출근. 이메일은 확인하니, 나는 모든 8개의 병동을 돌면서 음악 세션을 하라는 지시가 적혀있었다. 나는 병원 복도를 돌며 한 병동 당 30분 정도를 목표로 했지만, 환자들의 요구에 따라 더 있기도 했다. 간호사 스테이션 쪽에 사람들이 몰려 있기도 해서, 복도 순회 후 노래를 몇 곡 더 했다. 이렇게 모든 병동을 돌며 기타를 치며 노래하다 보니 겨우 붙어있던 기력은 바닥을 쳤고, 몸의 적신호가 느껴졌다. 퇴근 후 언니에게 그동안의 신세와 고마움을 전하며,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형부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 역시 입맛도 돌아오지 않고 몸이 예전과는 달라서 혼란 속에 빠져버렸다.



월요일 (10)

열흘 째 되는 날, 월요일 나는 집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일은 여전히 바빴고, 병동을 올라가서 사람들을 진단하고 소규모 음악치료 세션도 진행했다. 환자들의 방을 드나들었고, 장갑을 끼면 불안감을 조성한다고 상사에게 욕을 먹었다. 가장 바쁜 병동에 배치되어있던 나는 부서 사람들 중 가장 바쁘게 가장 열심히 일했다. 음악이라는 특성으로 여기저기 보내지며,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했다. 적당히 선을 그었어야 했지만, 기본상식과 도덕이 결여된 상사 밑에서 일하다 보니, 차라리 다 해주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덜 해가 되었다. 여기저기 환자들 중 확진자가 꽤 나타나서 확진자들을 위한 집중 치료실까지 생겨났다. 많은 직원들이 병가를 내기 시작했고, 누가 옮기고 옮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코로나 검사를 받을 수도 없는 미국의 참담한 현실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죽어나가고 위태로웠다. 나는 모든 짐을 챙겨서 내가 자취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 집엔 나 혼자만 사는 게 아니라 4명의 룸메이트들이 같이 생활하고 있다. 각자 바쁜 스케줄로 마주치는 일은 드물었고 다행이었다.


그 후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내 상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증상은 더 늘어버렸다. 목요일에 정점을 찍고 상사와 크게 다투었다. 금요일, 토요일엔 쉬어서 나아졌지만, 더 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요일에 출근 뒤, 내 몸은 코로나가 지배하게 되었다. 발열은 불분병 하지만, 몸살, 근육통, 오한, 두통, 설사, 식욕상실, 후각상실, 미각상실, 무기력함, 피곤함. 그리고 식은땀도 많이 났고, 나는 굉장히 아팠다. 불행 중 다행인 건 퇴근 후, 직장에서 제공해준 호텔에 입실했다. 다음날 (월요일) 전화로 병가를 알리고, 코로나 확진자 접촉이 있던 직원들에게 검사 시작이 다음날부터라, 수 차례 전화 시도 후 다음 날 스케줄을 잡았다. 드디어 검사받을 수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 소식을 언니와 친구들에게 알렸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도 없겠지만, 만약 일어났다면 어마어마한 벌금형이나 구속감에, 31번 확진자처럼 전 국민의 질타를 받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당시 미국은 아주 중증이거나 다 죽어가는 사람들 외엔 검사를 해주지 않았다. 검사 키트가 모자라서 하고 싶어도 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응급실이나 받아주는 곳도 없었고, 집에서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증상이 있는데도 풀타임 일을 하면서 공공장소에 돌아다닌 나를 개념 없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의료계 종사하는 확진자 대부분이 이렇게 생활했다. 아파도 아주 일어나지 못할 정도가 아니면 출근을 하고 일하면서...


이렇게 수많은 내 가족들과 친구들, 병원 사람, 방문치료 가족들, 많은 뉴욕 시민들을 확진자인 줄 모르는 상태로 접촉을 했다. 정말 다행인 건, 형부를 제외한 언니의 식구들, 내 친구들, 방문치료 가족들 모두 그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 건강하다는 것.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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