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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의 종말 후 나의 시간들

나라는 존재를 다시 회복하는 시간들

by graceforme

벌써 1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 말하면 10여 년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난 지 1년이 넘어간다. 겨우 1년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아직도 생각이 나고 기억이 나서 화가 난다. 아마도 완전히 벗어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그녀와 연 끊은 지 1년이 되던 어버이날 나는 아이들과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어버이날에 일부러 잡은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난 어버이날에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뭔가 통쾌한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간 그녀와 함께 하며 과연 해외여행이라도 가볼 수 있을까 암담했었다. 일거수일투족 항상 전화가 오고 어디라도 놀러 가면 질투할까 봐 거짓말로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서 벗어나면 제일 먼저 여행을 가고 싶었다. 연차가 없는 작은 회사를 다니면서도 여행에 대한 갈망은 컸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암에 걸리면서 이렇게 해보고 싶은 걸 못하고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아프면서 언제든 가까이 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여행을 먼저 예약했다. 실행하지 않으면 또 못 가게 될 거 같았다.



툭하면 어디서 받아와 쓰지도 않는 물건들, 자기가 사놓고 마음에 안드는 옷, 내 취향과 상관없이 선물이라며 줬던 옷들, 그녀가 사준 물건들을 다 버렸다.


그녀로부터 시작된 스트레스로 작년에는 혈압이 높게 나오기 시작했고 만성이 되었는지 다시 시작된 회사 생활에서도 계속 혈압이 높게 나왔다. 결국 혈압약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회사를 관두고 나서부터는 혈압이 정상으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혈압약을 끊었다. 약이 하나 줄었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다니기 시작한 정신과는 일 년이 넘어간다. 이번에 약을 하나 빼게 되었다. 잠도 잘 잔다. 나를 찾아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안 그래도 항암으로 8킬로가 빠졌는데 작년 어버이날 사건 이후로 한 달 만에 또 2킬로가 빠졌었다. 고등학교 때 몸무게로 돌아가버렸는데 그 이후로 계속 유지 중이다. 이건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나에게 자유로운 주말이 생겼다. 아이들도 자유가 생겼다. 물론 신랑은 2주마다 간다. 이제 효도는 셀프니 혼자 감당하길 바란다. 결혼하자마자 매주 토요일아침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시댁에서 보냈던 날들.... 이제는 없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시댁이 아니면 우리 집에서 토요일 아침부터 아침밥 차려놓고 그녀를 기다려야 했던 나날들... 이제는 우리 집에 그녀가 올 수 없다.


명절이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며칠 전부터 반찬을 만들며 보내던 시간들... 이제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 그냥 사 먹고 놀면 된다.


김장철이면 네가 한번 배운 대로 해보라며 시중드는 내내 짜증을 받아내야 했던 나날들.... 이젠 김치도 곧잘 해 먹을 수 있으니 김치 안 받아도 된다.


아플 때면 그녀를 위해 반찬이라도 해서 보내야 하는 날들... 자기 반찬이 제일 맛있다는 그녀이니 혼자 잘해 먹기를 바란다.


아프다는 핑계로 끝없이 내는 짜증들.... 모두가 그녀의 기분에 눈치를 봐야 했던 날들... 아예 안 보니 좋다.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른이 아님을 정말 절실히 깨달으며 난 저런 사람은 되지 말자는 다짐이 생겼다. 20세기를 살아온 그녀를 난 21세기에 만나 정말 힘들었다.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적응해야 한다. 정말 시금치에 "시"자도 듣기 싫다는 말이 너무나 와닿았다.


물론 그녀의 방식대로 잘해줄 땐 잘해줬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좋아해야 그것도 가능한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머리에 이고 사는 기분을 아시려나 모르겠다.


어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제발 어른답게 행동하자. 나를 점점 찾아가고 있는 지금의 내가 좋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내며 실천하고 즐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아침에 아이들도 바쁜 엄마 때문에 일찍 일어날 필요 없이 여유롭다. 아이들을 보내고 난 필라테스를 한다. 걷기 운동도 한다. 블로그 글을 쓰며 일상을 기록한다.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 책도 많이 보려고 하고 있다. 책 보고 필사도 한다.


저녁에 신랑 오기 전 밥을 하고 반찬도 만든다. 집에 있으니 오히려 마트를 더 자주 가게 되는 것 같다. 일상이 여유로워지며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10여 년을 얼마나 치열하게 힘들게 바쁘게 살았는지.... 아프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는 걸...


하지만 지금도 매일 생각이 난다.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꿈에도 나오는데 꿈에서 보는 그녀는 여전하고 미안함 하나 없는 얼굴이다. 그런 그녀가 꿈에서 조금만 잘 대해줘도 난 또 넘어가고 있었다. 꿈에서 깨는 순간 후회를 한다. 다음에는 못다 한 말 다 전하고 싸워야겠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두 번째 추석이 지나갔다. 명절 전에 한번 아이들만 다녀오고 추석에는 신랑 혼자 가서 그녀와 여행을 갔다. 신랑의 마음이 예전보다 한결 편해진 듯하다. 신랑이 여행 가서는 문자로 여기 아이들과 다시 오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중간에서 힘들어하던 그도 누눈가가 이 고리를 끊어주길 바랐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그랬듯이.... 이제 그녀도 잠잠하다. 아마도 연 끊었던 큰 아들과 다시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들만 있으면 되니까...

두 며느리는 이제 안 본다. 좀 더 일찍 정리했다면 난 아프지 않았을까 후회스럽다.


나이 먹었다고 어른이 아님을 기억하길 바란다. 나보다 더 지독한 시집살이를 한 분들도 많다. 지금도 고부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이들도 많다. 이제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길 바란다.


절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땐 벗어나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다.

누구도 해 줄 수 없다.

스스로 깨어나야 벗어날 수 있다.





지금 동안 제 글을 읽어 주신 많은 독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많은 분들의 위로와 공감을 댓글을 통해 느끼며 저도 힘을 많이 얻었습니다. 항상 건강이 먼저인 점을 기억하시고 내가 살아야 내 가족도 챙길 수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는 나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낳습니다.


시집살이를 견디신 부모세대 며느리, 지금도 시집살이로 고통받는 며느리, 결혼을 꿈꾸는 예비 며느리....

우리를 키운 건 시어머니가 아닌 우리 엄마입니다. 딸이라고 남의 아들 밥해주라고 공부 안 가르쳤나요? 아프면 밤새 보살펴준 것도, 공부 열심히 하라며 어려운 시기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대학을 보낸 것도, 날 먹이고 입히고 한 것도 우리 엄마이지 시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런데 단지 자기 귀한 아들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남의 자식한테 함부로 대하면 될까요?


며느리는 손님입니다.

자기 말만 잘 들어야 하는 종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딸입니다. 30여 년을 곱게 키웠는데 언제 봤다고 함부로 대합니까? 아들이 결혼하면 똑같은 출가외인입니다. 독립된 새로운 가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내 아들이 아닙니다. 제발 멀리서 지켜봐 주길 바랍니다.




다양한 글로 독자님들 뵙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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