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시작 한 지 거의 1년이 됐다. 서로의 다른 점에 끌렸고 그 다른 점 때문에 힘들지만 상대의 정신연령이 워낙 성숙하기도 하고 감정 기복도 없는 성격이라 그런지 크게 싸운 적은 없다. 처음으로 '만약 내가 결혼이란 걸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이 사람과 하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연애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라면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 일까.
가끔 연예인이나 유튜버가 TV에 나와서 "비혼주의였는데 이 사람을 만나 생각이 바뀌어 결혼까지 하게 됐어요"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ㅇㅇ주의라는 것은 한 사람이 삶을 사는 방식이다. 한 때는 채식주의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은 고기를 먹는 경우 처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며, 바꿨다고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유명인이 TV에 나와 저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을 참 싫어한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첫째.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을 결정할 거 라면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겠다'라는 비혼주의가 아니라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할 건데 아직 못 만났다'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고 결혼을 결정한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비혼주의가 아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혼을 결정하게 된 마당에 굳이 '제가 예전에는 비혼주의자였는데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나? '전 제가 비혼주의자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고요?' 라고 해라 차라리.
둘째. 그렇게 말하면 그전에 사랑했던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걸까? 어차피 헤어졌으니까 상관없는 걸까? 그럼 그 정도로 사랑하지도 않는데 연애를 왜 한 걸까? 단순히 지난 연인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는 말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난 모든 연애들을 부정하지 말자는 거다. 그전에는 결혼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만나는 사람하고는 결혼을 결심한 상황이면 그전에 만난 다른 연인들'의' 사랑이, 다른 연인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결혼 생각이 없었다는 말인데 그럼 왜 사귄 거지? 지금 결혼할 사람이 비혼주의인 자신의 신념을 바꿀 만큼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그전에 연애를 했을 때의 본인은 어렸거나 일에 더 집중하고 싶거나 하는 온갖 이유로 결혼 생각이 없었다가 어느 적당한 타이밍에 그런 이유들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결혼을 결정하게 된 게 아닐까? 나의 경우 비혼주의자라고 해서 진지하지 않은 연애를 한 것도, 누군가를 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셋째. 어쨌거나 저쨌거나 사람의 생각은 바뀔 수 있고 그 사람이 결혼한다고 내가 피해 보는 것이 아닌데도 저렇게 말하는 게 너무 싫은 이유는 비혼주의가 폄하되기 때문이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비혼주의자들을 믿지 않는다. 그냥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도 결혼 기미가 없으니 '결혼 생각 없어요' 라며 둘러대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혼을 하고 싶은데 '못' 하고 있어. 가 아니라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비혼주의자야.라고 말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물론 이런 사람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진짜 비혼주의자들도 있다. 나는 절대 '나 비혼주의자야' 라며 떠들고 다니진 않는다. 굳이 그런 말을 해서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대체 왜?'라고 되묻거나 '그런 애들이 제일 빨리 결혼하더라' 라며 폄하한다. 내가 평생 결혼을 안 하겠다는데 대체 네가 뭔 상관이냐. 나 늙으면 너한테 돌봐달라 할까봐 걱정 돼?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비혼주의자였다. 그땐 비혼주의라는 단어도 없고 오직 독신주의란 단어 뿐이었다. 근데 어린 나는 막연하게 '결혼은 아니어도 누군가랑 같이 살 수는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싫다. 그 단어를 상상만 해도 갑갑해진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결혼식을 그려보거나 결혼해서 남편, 아이들과 함께 어떤 집에서 살겠다 하는 꿈을 꿔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때도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는 애들이 제일 빨리 결혼한다'라고 하긴 했었다. 그들을 찾아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자, 보세요! 저는 이렇게 노처녀가 되었답니다!'
지금의 남자친구에게도 내가 비혼주의자임을 밝혔다. 보통은 남들에게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비혼주의라고 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비혼주의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게 맞다. 나는 나를 사랑해 주는, '이 사람이라면 가정을 꾸리고 살아도 행복하겠다.' 싶은 남자를 만났지만 결혼을 할 수 없다. 나는 결혼을 못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평생 함께 산 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가. 하지만 나는 못 한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를 '비혼주의자'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 점은 엄청 대단한 사람, 능력이 좋거나 성격이 좋은 혹은 둘 다 인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그런 게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