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래이스 Dec 20. 2024

20. 뇌리에 박힌 10개의 말

개인적인 Top10

내가 들은 수만 가지 말 중에 나의 성향을 잘 드러내거나 내게 큰 영향을 준 말들은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내가 들은 10개의 말을 들은 순서대로 정리해 봤다. 


1.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나라는 아이는 굉장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두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거 치고는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남들보다 더 꿈이 크고,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였다. 내가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터무니없는) 내 계획이나 꿈을 얘기할 때마다 엄마는 내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라든가 '좀 더 크면 다시 얘기하자.'라든가 '아휴. 그래 알았어, 알았어.' 하는 식의 반응을 보여 나를 김새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부정적인 부모님이 싫었고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심지어 내가 이런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난 걸 원망했다. 그리고 이젠 부모님이 나에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 물론 같이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 주고 응원해 주면 좋았겠지만 가난한 집안의 맏딸과 장남으로 태어난 그들에게 현실은 가혹했고, 하나뿐인 자식이 상처받고 실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리라.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대도 아니니 자식의 꿈을 이뤄줄 방법도 몰랐을 것이다. 지극히 평범했던 부모님이 감당하기에 나는 지나치게 큰 꿈과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아이였다.       


2. 너 미국 살다 왔어?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처음으로 영어 수업을 배웠다. 그전에도 알파벳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은 없었고 --si로 끝나는 단어의 I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친구들이 비웃은 적도 있었다. 나는 -스라고 읽었는데 애들이 -시라고 알려줬던 것 같다. 무튼 그때 즈음 내가 동경하던 미국이란 나라 사람들이 한국어를 쓰지 않고 영어를 쓴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더빙된 외화를 즐겨 봤으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국어를 쓰는 줄 알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팝송을 접하고 흠뻑 빠지면서 하루종일 팝송을 들으며 이건 무슨 뜻일까,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했다. Backstreet Boys의 Rock your body의 뜻을 알기 위해 영어 선생님께 Rock의 뜻을 물었다. your body는 아니까! Rock은 큰 돌, 암석 이라는데 너의 몸을 돌로 만들라는 건가? 난 학교 영어 선생님이 말해주는 것보다, 사전에 나온 것보다 그 너머까지 알고 싶었다. 단순히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라 미국의 문화, 가치관, 유행하는 것 모두 알고 싶었다. 그렇게 미국 문화에 심취해 있다가 중3 때 반 친구에게 "너 어릴 때 미국 살다 왔어?"라는 소리를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어보니 내가 미국문화를 잘 알고 있고,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항상 영어 성적이 좋아서 라나...  


3. 왠지 넌 잘 될 것 같아. 느낌이 그래. 

고등학교 3년 내내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공부에 큰 뜻이 없었으므로 나와 같은 반이 되기 위해 일부러 문과를 선택하고, 이후 사회과목도 나와 똑같이 선택해 3년 내내 같은 반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왠지 난 잘 될 것 같다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성공할 것 같다고.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꼭 그 친구 말대로 돼서, 내가 원하는 그런 성공한 사람이 돼서 내 주변 모두를 도와주고 싶었다. 슬프게도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겼고, 나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그 친구를 찾아 묻고 싶다. 너 그때 받은 그 느낌... 그거 뭐였니?  


4. 비행기표 사면 그때 말해 줘. 

내가 하도 툭하면 '한국을 뜰 거다', '미국 갈 거다', '여행으로 어디 어디 갈 거다' 말하고 다녀서 주변에선 지쳐 버렸다. 내가 '나는 000에 갈 거야'라고 말하는 건 언젠가 꼭 갈 거라 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뿐인데 친구들은 '왜 당장 갈 것도 아니면서 저렇게 말하지?' 싶었나 보다. 결국 '비행기 표 사면 그때 말해라'라고 계획 말하기를 금지당했다. 내겐 계획이었는데 그들에겐 너무 먼 미래의 꿈같은 거였나 보다. 

'나 캐나다 간다'라고 친구들에게 연락한 날, 마침내 그다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비행기표 샀다!'     


5. 못 하는데 좋을 수도 있지. 

처음으로 유럽에 갔다.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베를린, 쾰른, 다시 파리의 일정동안 놀랍게도 숙박비는 한 푼도 들지 않았다. 각 도시마다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이 자기네 집에서 자라고 초대해 줬기 때문이다. 솔직히 친구들을 만나려고 떠난 여행이고, 그거에 맞춰 짠 일정이었다. 함부르크에서 친구와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취미 얘기가 나왔다. 그 친구의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취미를 시작했는데 반에서 제일 못 그린단다. 자기가 봐도 너무 못 그렸는데 정작 그 친구는 너무 즐거워하며 미술 수업을 다닌단다. 이게 무슨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으나 음주운전은 아니다' 수준의 앞뒤가 안 맞는 말인가 싶었지만, 친구는 이내 이렇게 말했다. 못 하는데 즐길 수도 있는 거라고. 아시안 사람들은 꼭 잘하는 것만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그때 나는 '못 해도 좋아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사람을 원과 선으로 구성된 일명, 졸라맨으로 그린다. 그림을 정말 못 그리고, 미적 감각도, 색깔 센스도 없다. 하지만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을 산 기념으로 '프로 크리에이터' 어플을 구매했다. 유튜브에 왕초보 그림 튜토리얼 영상을 보며 따라 그린다. 영상에 소개된 그림과 내 그림은 전혀 다른 그림 수준으로 차이가 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을 온전히 집중하며 즐긴다. 어떤가? 이렇게 못 그리는데 왜 샀어? 왜 해?라고 내게 말할 수 있겠는가?     


6. '내려놓는 법' 이런 책 좀 찾아 읽어. 

'모든 것이 되는 법'이란 책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데 가장 친한 친구가 책 제목을 듣더니 한 마디 했다. '내려놓는 법' 이런 책은 없니? 그런 책 좀 찾아 읽어라. 그 당시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최소 10시간씩 일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퇴근 후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특히 주말엔 밤새서 놀고 다음 날 다시 출근하는 극단적인 스케줄을 감행하고 있었다. 나는 바쁜 나 자신이 너무 좋다. 몸이 바쁘면 머릿속이 덜 바빠 시끄럽지가 않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도 굴곡이 완만해진다. 하지만 그 당시엔 마치 강박증 환자처럼 '바쁘게 살아야 한다. 일분일초를 허투루 쓰면 안 된다.' 생각하며 노는 것도 일처럼, 업무 처럼 했던 터라 친구의 말을 듣고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됐다.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휴식 시간에는 온전히 쉴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7. 성공한 CEO는 그런 자잘한 건 기억을 못 하는 법이야. 

친한 친구와 지구 정반대에 살고 있지만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단순 수다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알게 모르게 자존감이 높아진다. 한 번은 근래 들어 심해진 건망증 때문에 자책한 적이 있었다. 당장 점심에 뭘 먹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며,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멍청해졌다며... 그러자 그 친구는 내게 성공한 CEO는 그런 자잘한 건 기억을 못 하는 거라고 말해줬다. 물론 전혀 과학적인, 사회적인 근거는 없고, 심지어 나는 성공한 CEO도 아니다. 그냥 우리끼리 이렇게 대화하며 노는 것이다. 언젠가 그 정도로 성공한 CEO가 되리라 믿으며...   


8. 그래놓고 제일 열심히 할 거죠? 

결국 퇴사 한 지 6개월째가 됐지만 1년 6개월 동안 일한 회사는 업무 외적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친한 동료들과 퇴근 후 따로 저녁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 때마다 '우리 꼭 받은 만큼만 일하자!'라든가 '우리 월급 루팡 하자! 업무시간에 딴짓이라도 하자'고 다짐했지만 그 마음은 그때뿐이었다. 출근을 하면 나도 모르게 제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내 업무가 아닌 것도 추가적으로 알아서 찾아보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며 나 스스로 업무를 늘리는 짓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극도로 열받아서 '나 이제 달라질 거예요. 일 열심히 안 할 거예요!!'라고 할 때마다 동료들의 반응은 그래놓고 제일 열심히 할 거 아니냐며... 이제 다 안 다며... 나라는 인간은 성격상 그게 안 된다며...    


9. 영어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제가 가장 부러운 누나예요.   

누가 나에게 '부럽다'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별로 없는데 유독 이 말은 기억에 남는다. 가장 최근에 들은 말이라 그럴 수도. 물론 나는 누군가 부러워할 만큼 영어를 잘하지도, 성격이 좋지도 않다. 나보다 영어 잘하고, 성격 좋은 애들이 널렸다. 그래도 주변의 누가 이렇게 말해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적어도 나를 좋게 봐줬다는 뜻이니까!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 하면 되지. 넌 다 할 수 있어. 

보조작가로 일할 때 첫 주부터 통찰력이 엄청난 작가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너는 지금 너무 급해. 조바심 내지 말고 천천히 해야 돼. 급하게 이룬다고 좋은 게 아냐.' 그 당시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은 나의 다급함과 조급함이 어떻게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드러났는지 모르겠지만 무튼 작가님께 그런 말을 들었다. 몇 달 후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내가 결국 포기한 어릴 때의 꿈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작가님이 바로 내게 '왜 포기해. 하면 되지. 할 수 있어. 00아! 넌 다 할 수 있어!'라고 강력하게 말해주셨다. 내 이름까지 불러주시면서 해 주신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다, 울었나? 무튼 내가 들은 가장 감동적인 말이자 이후에 글을 쓰는 걸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상기하는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