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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Jul 26. 2019

지는 해를 보다가...

바빠서 정신없이 살다가, 아파서 정신없이 살다가, 한 없이 게으름 피우느라 정신없이 아니 정신을 놓고 살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앉아 있었다.

횡단 열차를 탄지 며칠 째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딱히 할 일이 없어 꽤나 심심해하고 있었다.

밖을 보니 창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지는 순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걸려 나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감상에 빠져들게 되었다. 기차는 끝도 없이 펼쳐진 대지를 달리고 있었고 지평선 너머로 조금씩 사라지는 일몰은 도시에서 보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도 세상은 꽤 오랫동안 여전히 밝아 있었다. 

마치 내가 좋은 영화를 한 편 보고 난 후에 몇 시간 동안 그 영화 생각밖에 하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 또한 '해가 지고 난 후에도 그 여운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시지 않는 여운을 함께 느끼며 흔들리는 기차에 아무 말도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 있었다. 

어디에도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세상은 마치 여전히 해가 있는 것처럼 밝고 따뜻했다.

해가 지는 광경을 보지 않았다면 하늘에 해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만큼 세상은 여전히 환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도 한동안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온기 때문에 나는 한참을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으니까...

형체는 없이 따뜻함만 남은, 그의 자리였던 그 공간은 나에게 그와의 추억을 상기시켜줌과 동시에 더 이상 내 곁에 그는 없다는 허전함 또한 일깨워주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자 세상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해가 있던 자리 옆에는 달의 형체가 보였다. 

이제 세상은 금방 어두워질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 되면 해가 있을 때 그 세상이 얼마나 환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한 때 해가 그 자리에 있었음은 여전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해는 우리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그가 떠나고 더 이상 그의 자리에 온기마저 남아 있지 않을 때 내가 두 눈을 감는 것과 비슷하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내 기억에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한 때 그가 내 옆에 있었음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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