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찬 사람도 앓을 만큼 앓아야 끝나는 일
추운 금요일 밤이었다. 방금 한 분 예약이 잡혔다며 사장님이 웃었다. 사장님의 미소에 편승해 나도 웃었다. 장사가 잘 되면 나도 기쁘다. 알바를 빌미로 공짜 술 마실 가게가 없어지면 안 될 일이니까. 그런데 사장님의 미소가 좀 길어진다. 1인 예약이 그렇게나 매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은데... “사장님 왜요?” “이 분 SNS 닉네임이 서교동 불주먹이에요.”
느낌이 왔다. 이 사람, 만나봐야겠다. 사장님과 결명자차 한 잔 하며 어제 마신 술이 오늘 내 신체에 미친 영향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눈매가 또렷하고 입술이 빨간 20대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혹시... 불주먹 씨?”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단번에 그녀의 닉네임이 마음에 들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름은 묻지 않고 그녀를 ‘불주먹 씨’로 부르기로 했다. 나는 알바, 사장님은 사장님으로 소개하고 나니 이 곳, ‘이세상괜한걱정’ 버전의 통성명이 완성된다. 나도 그녀처럼 멋지게 성복동 000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싶었지만 성복동 찌질이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알바로 불리기로 했다. 불주먹 씨는 레드와인을 주문했다. 사장님은 블루문이라는 맥주를 골라 왔다. 우리는 빨간 와인과 파란 캔에 담긴 맥주를 마시며 금요일 밤 한 토막을 함께 보냈다.
와인을 반 병쯤 마시고 사장님의 특제 에어프라이어 만두를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는 완벽한 초면에서 서로에 대해 약간 아는 초면이 되었다. 와인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제가 너무 어리게 느껴지시겠지만...” 이십 대 그녀는 삼십 대 후반의 우리가 대단히 어른처럼 보였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나야말로 이 구역 제일가는 철부지”라고 고백하고 내가 했던 망나니짓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꾹 참았다. 지금은 그녀가 이야기할 때니까.
이십 대의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불주먹 씨는 당찬 사람인 듯했다. 어릴 적 공부도 곧잘 했고 큰 이변 없이 명문대에 진학하고 졸업했단다. 지금은 자취를 하며 야무지게 직장을 다니고 이직 준비도 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괜찮은데 문제는 ‘마음’이었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단다. 6개월 전 연인과 헤어졌는데 아직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단다. 요즘은 책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멍청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녀의 연애 후일담을 듣는 데 코끝에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추운 날 이태원 한복판에 서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와 내가 겹쳐 보였다.
이십 대의 가운데를 지나고 있던 때의 나는 사랑 앞에서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연애할 때 행복했지만, 연애하지 않을 때라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자취를 하며 직장을 다녔고, 이런저런 모임을 좋아했다. 친구가 지독한 연애 끝에 피폐하게 나타나면 술잔을 쥐어주며 “야! 세상에 남자가 걔 하나냐?”같은 안 하느니만 못한 소리를 해댔다. 그 말의 업보였을까... 그로부터 1년 뒤 겨울, 나는 이태원 한복판에서 최악의 이별을 경험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데 가슴이 덴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사랑 앞에서 자신만만했던 게 아니라 사랑을 몰랐던 거구나. 남친은 구남친으로 신분을 바꾸자마자 매몰차게 가버렸다. 나쁜 새끼... 너만 가냐? 나도 갈 거다. 하고 발을 움직이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얼빠진 얼굴로 한참을 서있다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딛으면서 생각했다. 오래 앓을 것 같다고.
이별한 뒤 얼마간 술 속에서, 친구의 다정 속에서, 또 그 이후 얼마간은 미친 듯 미드만 보면서 조금씩 구남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그래도 가끔 손 쓸 수 없게 괴로울 때면 그저 방에서 벽을 보고 울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에쿠니 가오리는 ‘그런 밤에는 파를 썬다’고 했다. ‘산더미처럼 썬 파를 된장국에도 넣고 두부에도 올린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울음을 그치고 밥을 먹는다’고. 나도 에쿠니 가오리처럼 스스로를 달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혔는지.
급기야 구남친이 그새 여자 친구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자 우울이 최고치를 찍었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 혼자 미련하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라고 토로했다. 나보다 먼저 피폐한 이별을 겪었던 친구는 “앓을 만큼 앓아야 끝나는 거다”라고 말해주었다. 전화를 끊은 뒤 그 말을 곱씹다 깨달았다. 내가 내 마음에 너무 인색했구나.
대학시절, 노트북 수리를 맡기다 오토바이 배기통에 종아리가 닿아 2도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가벼운 화상은 흉도 지지 않고 회복 시간도 짧지만 2도 화상은 차원이 달랐다. 다 아무는 데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포가 맺히고 터지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그때 나는 “내 종아리는 미련하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거나 “화상이 낫지도 않는 미련퉁이”라고 내 몸을 구박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치유에 전념했다. 진물을 흘리면 거즈를 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세심하게 종아리를 관찰했다. 종아리가 쓸리는 옷은 절대 입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이라고 종아리와 다를까. 최악의 이별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닦달했을까.
그때부터는 마음을 채근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이별은 ‘1도 화상’이 아니라서 시간이 더 걸리는 거라고, 회복기간을 길게 잡자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괴로운 밤이 찾아왔지만, 내가 나를 괴롭히지 않으니 그나마 살만했다. 그런 밤에는 모로 누워 진물 흘리는 마음에 거즈를 올리는 기분으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어서 느리지만 흘러 주었고, 6개월쯤 지나자 행복감, 충족감 같은 일상의 감각이 돌아왔다. 마침내 이별이 상처에서 흉터로 바뀐 것이다.
비슷한 경험을 하긴 했지만, 나는 불주먹 씨가 될 수 없기에 그녀의 마음이 언제 완전히 아물게 될지 모른다. 나처럼 6개월이 될 수도, 더 길 수도 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녀가 나처럼 ‘왜 여태 낫지 않느냐’며 마음을 다그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몸을 다루듯 마음을 다뤄주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충분한 치유의 시간을 죄책감 없이 가졌으면 좋겠다. 책이 읽히지 않으면 읽지 말고 나랑 찌질한 얘기를 주제로 수다나 떨었으면 좋겠다. 생의 감각이 회복될 때까지. 다시 매콤한 서교동 불주먹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