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혜 Oct 19. 2021

'불가해한 존재'와 9년째 살고 있습니다

고양이 반려인의 독특한 모닝 루틴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나면 고양이 두 마리와 아침 인사를 나눈다. 첫째 고양이 반냐와 둘째 고양이 애월은 내 인기척이 들리면 앞 다투어 달려온다. 녀석들은 커피를 내리느라 주방에 서있는 내 종아리에 머리를 비비며 어리광을 부린다. 나는 기껏 탄 커피를 싱크대 위에 올려두고 주방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양 손으로 고양이 두 마리의 등줄기를 열심히 쓰다듬는다. 반냐와 애월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는다. 비록 커피는 식어가지만 두 고양이가 내는 고롱고롱 소리에 마음이 평온해지는데...


그때, 갑작스럽게 반냐가 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돌려 내 손을 콱 깨문다. 아니 대체 왜?! 피는 나지 않지만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다. (상해는 입지 않을 정도로 조절해서 깨무는 게 더 얄밉다.) 쓰다듬어달라고 보채더니 막상 귀찮은 걸까?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곳을 건드렸나? 아침부터 당황스럽다. 결국 나는 해답을 찾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일어나 싱크대에 올려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따끈했던 커피는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다. 고양이들을 쓰다듬다가 한 번 깨물리고 식어빠진 커피를 마시는 일이 요새의 내 ‘모닝 루틴’이다. 


아침에 따끈한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 unsplash


매일 봐도 매일 새로운 너라는 존재 


고양이 두 마리와 9년째 살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녀석들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고양이를 키우기 전에는 ‘10년쯤 키우면 고양이의 모든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어림없는 소리였다. 


물론 함께한 세월이 쌓이면서 고양이의 습성을 많이 배우기는 했다. 고양이가 창밖의 새를 보거나 레이저 포인터 장난감으로 놀다가 “깍깍”하는 소리를 내는 건 고장 나서가 아니라 ‘채터링’(사냥 본능의 일환으로 내는 소리) 중이라는 것. 고양이가 벌레를 잡아다 방바닥에 떡하니 놔두는 건 인간을 향한 해코지가 아니라 음식을 나눠주는 호의라는 것. 초보 집사 시절에는 책이나 포털 사이트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해의 폭을 넓히기도 했었다. 


이제 나는 반냐가 집안의 어디서 해바라기를 하는지, 애월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 무엇인지, 두 고양이들의 취향과 호불호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고양이와의 생활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며칠 전에는 지인이 우리 집에 방문했는데 둘째 고양이 애월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애월은 낯을 가리는 반냐와 달리 우리 집 공식 ‘접객묘’다. 손님이 오면 거리낌 없이 다가가 쓰다듬어달라며 머리를 들이민다. 그러던 애월이 어딜 갔는지 털끝도 보이지 않는 거다. 애월을 유난히 귀여워하던 지인은 녀석을 찾지 못해 못내 아쉬워했다. 애월을 발견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지인은 신발장으로 걸어가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애월은 지인의 신발에 얼굴을 비비며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술에 취하듯 신발에 취했던 너의 모습... ⓒ unsplash


영원히 얼마쯤 불가해한 존재 


아직도 그날 애월의 도취된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신발이 캣닢(고양이들이 좋아하는 풀, 대다수의 고양이는 캣닢을 먹거나 향기를 맡으면 벌렁 드러누워 황홀경에 빠진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취한 모습이라니.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우리 집을 다녀갔지만 애월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지인이 유독 자기를 아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특정한 냄새가 애월을 빠져들게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 신발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고양이 두 마리와 살면서 나는 녀석들을 100%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다. 글을 쓰는 지금도 반냐는 낮잠을 자다 말고 부스스 눈을 뜨더니 어느새 벽의 한 지점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대체 뭘 보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몇 번이나 벽을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다. 햇빛도 들지 않는 흐린 날, 초파리 한 마리 없는 벽의 한 지점을 왜 저렇게 열중해서 보는 걸까. 고양이 언어를 모르는 인간은 이유를 알 수 없다. 고양이는 영원히 내게 불가해한 존재일 것이다. 


네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한낱 인간인 나는 알 수 없겠지. ⓒ unsplash


불가해한 존재와 함께 사는 건 때로 고단하지만 대체로 흥미롭다. 나는 고양이들과 소통하고 싶을 때면 행동과 눈빛 같은 비언어적 표현들을 쓴다. 예를 들어 고양이에게 애정을 전하고 싶을 때 나는 고양이와 눈을 맞춘 상태에서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뜬다. ‘고양이 눈키스’로도 불리는 인사 방법인데, 애월과 반냐는 십중팔구 인사를 되돌려준다. 


물론 소통이 언제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고양이들은 가끔... 실은 자주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녀석들 눈에는 인간이 매일 사냥에 실패하고 빈손으로(하다못해 피라미나 귀뚜라미도 없이) 귀가하는 게 얼마나 처량해 보이겠나. 덩치는 자기들 열 배는 되어 보이면서 창밖의 새는 보지도 않고 작은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인간이 희한해 보이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서로를 불가해하게 여기면서도 지지고 볶고 함께 살아가는 게 흐뭇해서다. 생각해보니 고양이와 인간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얼마간 불가해한 존재 아니던가. 


매거진의 이전글 나보다 먼저 늙는 나의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