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 짙은 오렌지컬러가 감돌기 시작했다. 날이 쌀쌀해지면서 해가 떠오르는 시간도 늦춰져 이젠 출근길 88올림픽대로에서 일출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이 도로처럼, 상희는 매일이 반복되는 이 생활이 사실 이젠 지겨웠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의 사회생활이 상희에게 어느 정도 지위를 주었지만, 남들보다 조금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도 조직 안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게 없을 정도로 적었다. 그나마 점심, 저녁 회식메뉴 정도이려나. 하지만 이젠 지갑을 먼저 열지 않으면 누군가와 밥을 함께 하기도 쉽지 않은 위치라는 점은 가끔 상희를 서글프게 했다. 오늘 아침은 2샷 넣은 아메리카노로 잘 준비해두었으려나. 얼마 전 새로 온 비서가 아직은 좀 서툴렀다. 그래도 상희는 아직 그녀에게 화를 내진 않았다. 상희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나이보다도 5살이나 어린 친구한테 먹는 걸로 화내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런 것으로 화를 내기엔, 다른 화를 낼 일이 그 5평짜리 공간에 가득차 있었다.
"그 어플에 1억을 들여서 상을 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몇 개 더 팔 수 있는데, 박 책임, 지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상희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시절에는 TV, 신문, 매거진 정도만 신경쓰면 됐었지만, 지금은 SNS 채널, 소비자들이 운영한다는 온라인 커뮤니티 등 신경 쓸 곳이 너무 많았다. 회사 안의 상사들 말고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던 광고영상만 해도, 지금은 광고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지 않다, 내용이 성차별적이다 등등 온갖 댓글을 달 수 있는 세상이다. 혹여나 마케팅 프로그램에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여론이 생기고 이것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임원회의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상희가 오롯이 감당해야했다. 게다가 올해 들어 투입된 마케팅 비용 대비 매출에 대한 압박도 심해졌다. 마케팅과 영업뿐만 아니라 연구, 구매, 심지어 인사, 총무까지 모든 부서가 '애자일(Agile)'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신임 CEO의 경영철학 때문이었다. 이에 맞춰 상희는 이 날 영업 담당 상무와의 미팅을 11시에 잡아두었다. 오늘은 미팅 후에 그와 점심까지 함께 해서 확실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지금 이걸로는 영업 설득 못해. 최 상무랑 미팅까지 1시간 반 정도 남았으니깐 예상 매출액 다시 잘 계산해서 가지고 와요."
말로는 '예'라고 하면서도 방을 나가는 박 책임과 이 팀장의 표정은 뾰로퉁했다. 모든 마케팅 프로그램이 회사에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절실함은 실무자들에겐 전달되지 않는듯 했다. 내가 실무자일때도 그랬던가. 근시안적이고 파편적인 시각은 저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텐데. 요즘 실무를 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상희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상무님, 방금 최 상무님 비서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오늘 11시에 다른 일정이 생기셔서 회의 취소해야 할거 같다고.."
아무래도 최 상무가 자기를 무시하는게 분명했다. 이전 본부 회의에서도 상희가 하는 말에 사사건건 반대를 했던 최 상무였다. 어느 조직이나 영업과 마케팅이 잘 지내기는 힘들다고 해도 같은 상무레벨로써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최 상무 저 사람도 오래갈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본부장님이 30분 뒤에 잠시 들르신다고 하십니다."
"본부장님이?"
최 상무와 친해질 기회는 취소됐어도 본부장이 직접 온다고 하니 상희는 기분이 갑자기 나아졌다. 아마도 얼마전에 새로 출시된 아이섀도우 라인에 대해 마케팅에 지시할게 있는 모양이었다. 비교적 색조라인이 약했던 S사가 1년을 공들여 이번에 출시한 색조 화장품이었기에 특히 마케팅에 거는 기대가 컸다. 본부장과 마케팅 관련해서 1:1 독대로 이야기를 한게 거의 반년만의 일이라 가벼운 긴장감이 상희를 감쌌다.
"김상희 상무, S사에서만 20년 일했죠? S코스메틱이었던 시절부터.."
상희가 비서를 시켜 준비해둔 커피잔을 매만지며 장 본부장이 말을 꺼냈다.
"네, 20년 좀 넘은거 같네요."
얼마 전 임원들에게 하나씩 지급된 태블릿PC의 메모 어플을 열며 상희가 대답했다. 아이섀도우 라인에 대한 마케팅 아이디어를 적은 메모를 열어두었다.
"음..이런 말은 사실 어떻게 해도 기분이 안좋을테니깐.."
이야기의 방향이 예상했던 것과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상희의 머리를 스쳤다.
"얼마 전에 신임 CEO가 사업본부장들이랑 조직 이야기를 좀 했고, 전반적으로 조직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지금 회사 상황을 타파하는데 꼭 필요하겠다는게 CEO와 지주사의 생각입니다."
이 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무엇일지 궁금해 할 틈도 없이 장 본부장은 상희의 눈을 똑바로 보며 이야기했다.
"김 상무는 올해 11월까지만 하고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임원이 되었던 3년전부터 매해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마다 상상했던 그 순간은 이렇게 예상치도 못하게 갑작스럽게 닥쳐왔다.
상희는 얼굴의 온도가 갑자기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순간에 본부장에게 자신의 당혹감을 읽히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임원까지 했던 사람을 그룹사에서 그냥 두진 않을거고, 좀 기다리면.."
태블릿PC는 눈치도 없이 켜져있었다.
"그렇군요. 네 잘 알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태블릿PC의 화면을 끄고 자리를 벌떡 일어난 상희는 장 본부장에게 직접 방 문을 열어주었다. 본부장은 상희의 행동이 예상치 못했던 반응인지 순간 멈칫했으나, 더이상 할말도 없었던지 그대로 상희의 방을 나갔다.
상희는 급한대로 가방을 챙겼다. 이 방에, 이 건물에 단 1분도 머무를 수 없었다. 이 팀장이 무언가를 잔뜩 인쇄해서 들고 왔으나 1글자도 보고싶지 않았다.
"상무님, 아까 시키신거.."
"최 상무랑 미팅 취소됐고, 이젠 내가 볼 일 없을 것 같으니 알아서 챙겨요.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아직 무슨 일인지 알지못하는 직원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뒤로 하고 상희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버튼을 아무리 눌러대도 그 날따라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S코스메틱 마케팅팀 김상희 대리입니다."
"안녕하세요, S코스메틱 상품기획팀 김상희 차장입니다."
"안녕하세요, S사 화장품 마케팅 1팀 김상희 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S사 화장품본부 마케팅 담당 김상희 상무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상희를 소개하는 문구에는 언제나 'S코스메틱' 혹은 'S사'가 앞에 있었다. 올해 중학생이 된 딸에게도 상희는 S사를 다니는 자랑스러운 엄마였고, 친구들에게도 상희는 S사에서 잘나가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 날, 상희는 자신의 이름 앞뒤에 자리잡고 있던 수식어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무작정 사무실을 나왔는데 이대로 집에 들어갈수도 없었기에 상희는 그렇게 한참을 한강 고수부지 주차장에 앉아있었다.
"상무님, 김수진 과장이 회사를 그만 둔다고 합니다."
김수진 과장은 상희가 좋아했던 몇 안되는 직원 중 하나였다. 회의 도중 상희가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물어보면 다들 대답하는 기계처럼 영혼없이 '네','네'하는 와중에도, 김수진 과장은 자신의 생각이나 제안을 조리 있게 이야기했다. 물론 그 생각 중 절반은 상희를 통과하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이 팀장, 벌써 그 팀에서 지난 3개월 동안 3명이 퇴사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예요?"
이 팀장은 한참을 생각하는듯 하더니 아무 말없이 상희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서 상희는 '당신이 그 이유를 더 잘 알지 않느냐'는 이 팀장의 답변을 들었다.
"김 팀장님이 그런 취급을 이 회사에서 받다 나가셨는데, 그럼 여기 있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어요?"
역시나 김수진 과장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김 팀장이 무슨 취급을 받았다는 거지?"
"상무님, 모르시는 척 하지 마세요. 아무튼 저는 제가 지금 왜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버려야 하는지도 모르겠구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김 팀장은 화장품본부에서 야심차게 내놓았던 '줄기세포 크림'을 과장 광고하여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감봉이라는 징계를 받았다가 1달 뒤 퇴사했다. 하지만 그게 본부장과 회의를 할 때 나온 단어 하나 하나를 그대로 광고물에 넣다보니 일어난 일이었다는 건 화장품본부의 직원이라면 모두가 알았다. 회사에서 처음 내놓는 줄기세포 관련 화장품 라인이었고, 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갓 넘어온 본부장이 사활을 걸고 있는 프로젝트였기에 광고문안 하나 하나까지 본부장의 입김이 들어갔다. "그동안 줄기세포라는 단어를 쓴 기존의 화장품들은 모두 가짜", "세포를 재생시켜 주름을 0%로 만들어준다"했던 문구에 과장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상희도 회의석상에서 과장이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이야기해보았으나 회사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몸이 달은 본부장에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상희는 본부장의 의견을 그대로 김 팀장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참지못한 경쟁사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였고,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경쟁사가 손해배상 소송까지 걸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 사건은 임원들은 모두 비켜간채 김 팀이 최종 가해자인 것으로 회사는 결론을 내렸다. 사건으로 받게 된 사내 감사에서 김 팀장이 협력사에게 향응을 받은 것이 밝혀진 탓이 컸다. 향응이라고 해보아야 저녁식사 2-3번 수준이었지만, 그 중 딱 한번 인당 5만원 이상의 저녁을 먹은 것이 문제였다. 평소에 김 팀장을 좋아하던 직원들은 김 팀장이 다친 것을 본인들이 다친 것마냥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김 팀장을 지키지 못한 상희를 원망하였다. 하지만 상희가 그나마 김 팀장 징계를 '감봉' 수준에서 마무리시킨 것은 다들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김 팀장의 퇴사는 그 누가 떠민 것도 아닌, 순전히 본인의 판단이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생각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인 것인지, S사에서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혹은 갑자기 생긴 자유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희의 뇌가 자꾸 S사에서의 일들을 소환해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상희는 화장품본부에서 마케팅 담당을 맡았던 지난 3년동안 브랜드 라인도 여러 개 성공적으로 런칭 시켰고, 동영상 플랫폼에서 '올해의 광고상'을 받아 다른 회사 마케팅 직원들 앞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었다. 다만 갈수록 치열해지는 화장품 시장에서 회사의 전체 매출은 지주사에서 원하는 만큼 증가하지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때쯤 직원들이 줄줄이 퇴사한 것과 줄기세포 크림 이슈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라는 것이 상희의 결론이었다. 혹은 마케팅 담당에 자신의 라인을 데려오고 싶어하던 본부장에게 좋은 구실이 생긴 것일수도 있겠다. 정작 그 모든 이슈의 원인은 본부장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는 의미없었다. 상희가 없어도 S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분주하게 돌아갈 터였고, 상희는 S사에서 없어진 존재가 되어버렸을 것이었다. 평소에도 회사에서 쓸데없이 너무 큰 차를 준다고 생각했는데, 이 날 따라 혼자 앉아있는 자동차가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제 동생이 작은 커피브랜드를 차린지 한 3년쯤 됐는데, 이름이 뭐였더라..아! H!”
직장에 다닌다고 소홀했던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볼까 싶어 나갔던 학부모 모임에서 상희의 이력을 알고 있는 딸아이의 선생이 갑자기 자기 동생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 반 학부모 중에 S사에서 마케팅 임원하는 분이 있다고 했더니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비록 “전” 임원이었지만 대기업에서의 임원 타이틀이 어디 가진 않는 모양이었다. 상희는 그러지 않으려 하였지만 괜시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H커피라면 마케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브랜드이다. 대기업이 아닌 작은 스타트업이 인스타그램 같은 이미지 중심의 SNS를 잘 활용해서 급성장한 사례였기에 상희도 그룹사 마케팅임원 세미나에서 들어본적이 있는 브랜드였다.
“저희 브랜드가 마치 소가 뒷걸음질치다 뭐를 밟은 것처럼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떠서 이만큼 성장했지만 좀더 체계적인 마케팅이 필요할것 같아서요.”
이 정도 규모의 회사라면 전 회사보다 연봉은 많이 줄겠다. 그래도 이젠 돈 때문에 일할 나이는 지났다고 상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상희에겐 지난 경험과 노하우를 살리고,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저희 자문 역할을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은 브랜드여도 CMO (최고마케팅임원) 자리면 괜찮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자문'이라는 단어가 대표의 입에서 나오자 상희는 본인도 모르게 실망을 해버렸다. 사실 S사의 계열사 한 곳에서도 자문 역할 제안이 왔었다. S그룹은 자문에게도 임원으로 재직할 당시만큼의 연봉과 차량을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S에서 “자문”이라 함은 퇴직한 임원들이 경쟁사에 정보를 팔거나, 경쟁사로 이직을 할까봐 인사팀이 관리하는 것뿐, 진짜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상희는 거절했다. 무엇보다 계열사 자문이라고 해도 거느리고 있었던 직원들과 정기적으로 미팅을 하고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희는 H커피 본사를 잠시 둘러보았다. 본사라고 해봐야 30명 규모의 공유 오피스에 자리를 잡은 회사였다. 커피원두는 공정무역 인증을 받은 에티오피아의 농장으로부터 들어오고, 가공공장은 강릉에 두었다고 했다. 자문이란 직함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고, 회사도 매우 작았지만 자신을 “테디”라 소개한 대표에게서 왠지 모를 진정성이 느껴졌다. 마케팅을 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그저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떠드는 공허한 단어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이 대표에게선 H커피가 공정무역을 통해 세상까지 이롭게 하고자 하는 브랜드라는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CMO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브랜드를 '자문'이라는 직함으로라도 키울 수 있다면 분명 보람찰 것이었다. 이거야 말로 '지난 경험과 노하우를 살리고 즐기면서 일하는' 자리일 터였다.
“하지요. 자문”
“감사합니다!”
밝게 웃는 젊은 대표의 얼굴에 상희의 기분도 꽤 오랜만에 밝아지는 것 같았다.
S사에선 담당 임원만 되어도 작은 방이 생겼었다. 그룹장, 사업본부장 한단계 한단계 올라갈때마다 방의 크기는 더욱 커졌고 그만큼 직원들은 그 방에 들어갈때마다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심지어 자문들에게도 아주 작은 방과 다른 자문들과 함께 활용할 수 있는 비서가 배정되었다.
H커피는 대표마저도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직원들이 상사에게 접근해서 이슈를 이야기하거나 논의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상희는 마케팅 팀장 옆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팀장”이라고는 해도 아주 어린 ‘에밀리’라는 친구였고, 에밀리 밑에는 직원 3명이 있었다. 에밀리는 인스타그램을 정성스럽게 관리해서 회사를 이만큼 성장시킨 주역이라고 했다.
기왕에 새로운 명함을 갖게 된만큼 에밀리를 잘 이끌어서 이 회사를 성공시켜야겠다고 상희는 생각했다. 상희가 S사에서 상무자리까지 오른 건 그저 대기업에서 윗사람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서도, 예산의 규모가 커서 규모감 있는 마케팅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 내 나름의 실력이었다는 것을 이 곳에서도 보여주고 싶었다.
“H커피를 사먹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뭐..커피를 좋아하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있는..”
“예를 들어 이 커피를 사먹는 사람은 30세일까? 32세일까? 직장인일까?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일까?”
어린 친구들은 순간순간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강할지 몰라도 체계적인 마케팅, 브랜딩에 대한 고민은 깊지 못하다. 상희는 에밀리에게 매주 함께 생각해야 할 숙제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트렌드를 읽고 컨텐츠 만들고 광고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 당장에 매출을 만들어야 하니깐. 하지만 브랜드가 더 커지기 위해선 브랜드의 페르소나를 제대로 정의하고 모든 마케팅 방향성을 그 페르소나에 맞게 이어가는게 중요해요. 사람들이 H하면 아! 이런 느낌이지 하고 알 수 있게”
“그치만 이미 그건 어느 정도 되어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인스타그램만 봐도..”
“오프라인 카페는 맞아요. 에밀리 말대로 자연스럽게 오는 사람들의 특징이 드러나게 되어있지. 하지만 온라인으로 원두, 굿즈 시장에도 진출하려고 하잖아요. 그럼 그 특징이 온,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더욱 뾰족하게 드러나도록 고민해야 하는거지.”
에밀리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상희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에이전시랑도 고민해볼게요. 거기도 브랜딩하는 파트가 있다고 하니.”
“아 에이전시도 있구나. 언제 한번 나랑도 같이 봅시다.”
일할 곳이 정해지니 상희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역시 화장하고 회사 다녀오는게 제일 신나지?” 라는 딸아이의 뼈있는 한마디에도 웃음이 절로 났다.
주말에는 S사 입사동기들과 골프약속이 있는데, H 커피원두를 1봉지씩 선물할 계획이었다.
에이전시를 만나는 회의가 아침부터 잡혔는데 주차에 시간을 너무 허비해버렸다. 임원들의 주차자리가 지정되어 있던 S사와는 달리, 여러 회사가 공존하고 너도 나도 차를 가지고 올 수 있는 공유오피스이기에 남들보다 조금만 늦어도 주차자리 찾는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출근길을 허둥대며 회의실을 찾아간 상희의 눈 앞에 생각지도 못한, 줄기세포 크림의 주인공이었던 김 팀장이 있었다. 김 팀장도 당황한건 마찬가지인 듯 했다.
“아, 맞다. 김 실장님도 S사 출신이라고 하셨죠? 그럼 클레어 자문님이랑 실장님이랑 서로 아실 수도 있겠구나!”
에밀리의 해맑음이 이 순간만큼은 매우 얄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