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시를 만나는 회의가 아침부터 잡혔는데 주차에 시간을 너무 허비해버렸다. 임원들의 주차자리가 지정되어 있던 S사와는 달리, 여러 회사가 공존하고 너도 나도 차를 가지고 올 수 있는 공유오피스이기에 남들보다 조금만 늦어도 주차자리 찾는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출근길을 허둥대며 회의실을 찾아간 상희의 눈 앞에 생각지도 못한, 줄기세포 크림의 주인공이었던 김 팀장이 있었다. 김 팀장도 당황한건 마찬가지인 듯 했다.
“아, 맞다. 김 실장님도 S사 출신이라고 하셨죠? 그럼 클레어 자문님이랑 실장님이랑 서로 아실 수도 있겠구나!”
에밀리의 해맑음이 이 순간만큼은 매우 얄미웠다.
“네, 잘 알죠.”
하지만 속마음을 감출 줄 아는 것이 비즈니스의 미덕 중 하나 아니던가. 상희는 가벼운 미소를 띄며 김 팀장, 아니 실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김 실장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악수에 응했다. 김 실장은 상희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마른 듯 했고, 피부톤도 어두워진 것 같았다. 다만 안경 안의 동그란 눈만은 그때와 비슷했다. 김 팀장은 그 당시에도 회사 안에서 눈에 총기가 도는 몇 안되는 후배 중 하나였다.
“오늘은 SNS 이번달 운영 계획이랑 키워드광고 전략을 준비해왔는데요.”
“그보단, 지난 주에 내가 에밀리 팀장하고도 이야기를 좀 했는데, 우리 브랜드의 페르소나를 재정립하고 브랜드 활동 전반을 관통하는 플랜을 수립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S사에서도 김 팀장이 시키는 일은 빠릿빠릿하게 했어도, 조금 더 큰 관점에서 고민하고 전략을 도출하는 일에 대해선 늘 아쉬웠었다.
“그 얘긴 오늘 주간회의 끝나고 말씀드릴건데요, 자문님”
에밀리의 말투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자신의 권한이 침범되었다 생각되면 젊은 친구들의 목소리에선 치기어린 반항심 같은 것이 느껴질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내가 너무 급했네. 오케이, 알겠어요. 원래 하려고 했던거 해봅시다.”
그 회의실에선 상희가 가장 큰 어른이었다. 다시 한번 속마음은 숨긴채 어른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상희는 순간적으로 판단하였다.
“이번 시즌엔 딸기제품을 시즈널리티 제품으로 강조할 거라고 하셔서 관련 컨텐츠들로 준비해보았구요...”
김 실장 밑의 직원인 여직원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상희가 보기엔 대행사에서 나눠준 PPT 자료 속 컨텐츠들은 어느 카페, 베이커리브랜드가 해도 어색하지 않을 이미지들이었다. H커피가 아니라 동네 P 빵집 로고를 가져다 붙여도 그러려니 할 것만 같은 평범한 이미지들이었다.
“이걸로 충분할까요?”
1시간 내내 에밀링와 김 실장 쪽에서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꾹 참고 있던 상희는 이대로는 정말 안되겠다 생각했다.
“김 팀장, 마케팅 오래했으니 잘 알잖아요. 브랜딩 제대로 하려면 더 뾰족해야 한다는거.”
순간 고개를 들고 상희를 바라보는 김 실장의 눈에서 얼음 같은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 뒤에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자문님.”
“컨텐츠 방향성도 브랜딩이 정리되면 같이 가는 거니깐요. 다음 달 월간회의 때 더 이야기해보시죠, 실장님”
마무리하던 에밀리는 상희에게 주지시키려는 듯 ‘실장님’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내가 실수했네. S사에서 팀장으로 일을 했어서..수고했어요. 김 실장.”
상희의 인사에 김 실장은 가벼운 목례 후 급하게 나갔다.
‘오늘 오랜만에 반가웠어요. 이렇게 또 인연이 되네. 아까 한 이야기는 같이 고민해봅시다.’
문자를 이렇게 보내도 될까. 상희는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완성한 문자의 전송버튼을 누를까말까 고민했다. 김 실장은 S사를 그만둘때 상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었다. 서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어렵게 '전송'한 상희의 문자에 김 팀장, 아니 실장은 답변이 없었다.
“세상의 빛을 당신의 눈 위로”
마케팅 담당시절 암행어사처럼 S 로드샵을 둘러보던 버릇이 아직도 상희에게 남아있었다. 그때는 개선포인트를 찾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은 ‘어디 나 없이도 잘 하나 보자’는 마음이 커졌다는 점이 차이였다. 역시나 아이라이너 런칭 광고는 문안부터 엣지가 없고 너무 별로라고 상희는 생각했다. 로드샵은 10-20대 초반 여자아이들을 타겟으로 하는데 저 문안은 레트로컨셉이라고 해도 너무 촌스러웠다. 최 상무가 런칭 회의 때 레트로 컨셉을 얘기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 가만히 있으라고 쏘아붙였었는데, 결국 회사에 남게 된 최 상무의 생각대로 광고컨셉이 정리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제 막 런칭한 라인에 벌써부터 1+1 프로모션을 걸어서 스스로 가치를 깎아먹고 있었다. 이것 역시 당장의 영업실적이 중요한 최 상무의 입김일 것이다. 이래도 이 라인이 성공이나 할 수 있으려나. 걱정되는 마음으로 아이섀도우를 한참 보던 상희는 스토어 아르바이트생들이 본인을 지켜보는 눈길이 느껴져 자리를 떴다.
“요즘 레트로가 트렌드인데, SNS 운영컨셉을 90년 느낌의 레트로로 해보면 어떨까요? 마치 ‘다방’처럼”
그놈의 '레트로'를 여기에서까지 들어야 하다니. 지금 반짝 트렌드라고 따라가면 브랜드를 망칠 뿐이라고 그렇게 S사에서부터 여러 번 이야기를 했건만.
“1달동안 고민한게 그거예요? 우리 페르소나랑 맞아요?”
“자문님, 우리 페르소나가 30대라면, 90년대 느낌 좋아할텐데요.”
“아니 내 말을 아직도 그렇게 못 알아들어요? 다시 물을게요. 우리 페르소나가 누구죠? 32살이예요? 35살이예요? 에르메스 가방을 들어요? 아님 에코백을 들어요?”
상희 날카로운 질문에 김 실장은 말을 잃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오늘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했는데요, 자문님.”
얼음을 조심스럽게 깨려는 듯, 에밀리가 말을 꺼냈다.
“제가 S사에 있을때도 여러 번 느꼈는데, 자문님은 회의를 할 때 안건의 순서는 제쳐 두고 늘 생각하고 계신 것이 먼저 안나오면 버럭하는 버릇이 있으시더라고요. 저희는 지금 H커피 마케팅팀장인 에밀리 팀장이 저희 메인 파트너이기 때문에 안건의 순서도 에밀리 팀장님과 정하고 있습니다.”
줄기세포크림으로 감사를 받은 내용을 보고할 때 보았던 김 팀장의 눈빛을 한번 더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상희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눈물이 고인 듯 촉촉하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 부릅뜬 눈. 하지만 그 눈빛에 지금 밀릴 수는 없었다. 상희 또한 S사에서 보여줬던 카리스마를 보여줄 시점이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거부터 이야기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김 실장 그렇게 감이 없어요?”
“오늘 회의 안되겠네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페르소나는 다음에 이야기하시죠.”
에밀리가 노트북을 탁 덮었다.
H의 원두커피는 산미가 진하지 않았다. 그래서 블랙커피도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운게 대표의 이미지와 참 닮았다고 상희는 생각했다.
"자문님, 제가 생각지 못한 포인트를 집어주시고 조언해주시는건 감사한데요, 김 실장님하고 불편한게 있으시면 월간회의에는 안 들어오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에밀리는 돌려서 이야기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게 'MZ세대'라고 불리는 세대들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불편한거 없어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대행사하고 늘 웃으면서 지낼 수만도 없고 그래서도 안돼. 대행사는 업무 파트너이긴 하지만 명확한 갑을관계가 있는 사이이고, 클라이언트가 똑똑하게 굴지 않으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까 회의에선 너무 감정적이셨던거 같아요. 지금이 무슨 90년대도 아니고, 대행사가 클라이언트의 감정쓰레기통도 아니잖아요."
그 부드러운 커피에서 갑자기 쓴 맛이 느껴져서 상희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스스로 이성적이고 감정조절을 잘해서 대기업 임원자리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아이에게 저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기가 차서 상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는 오늘 광고실적 마감 정리해야 해서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메마른 목소리로 에밀리는 목만 까딱 인사하고 일어났다.
S사에 있을때도 최근 2-3년 사이에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고들 했다. 직원 대부분이 '다른' 세대인 H커피에선 상희가 오히려 생각도 행동도 다른 사람일 터였다. 아직 S사에 반납되지 않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며 H커피에서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던 상희 눈에, 담배를 피고 있는 김 팀, 아니 실장이 보였다. 그래, 어른이 풀어줘야 하는 일은 어른이 나서야지라고 상희는 한번 더 결심했다. 망설이지 않고 상희의 스마트폰에서 여전히 '팀장'인 "김상훈 팀장"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이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김 실장은 전화를 받지 않고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채 자리를 떴다.
S사를 다닐 때부터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가 있으면, 상희는 그날 밤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 병은 S사를 떠났음에도 고쳐지지 않아서 김 실장과의 문제가 본인을 집어삼킨 날, 상희는 서재에 앉아 H커피의 웹사이트를 하나하나 훝어보았다. SNS에 올라온 방문자들의 사진과 '전체 공개'되어 있는 방문자들의 SNS에서 생활패턴도 확인해보았다. H커피는 20대들 사이에서 '커피값은 비싸지만 일반 체인점에서 느낄 수 없는 감성'이 있고, '특히 인테리어가 눈에 띄는' 커피숍으로 인기를 끌었다. 20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30대에게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결국 H커피의 핵심 타겟은 모두 20대 중후반 친구들이었다. "26살에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김윤경 씨"에게 맞는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가 상희의 결론이었다. 이 친구들은 무엇을 좋아할까. '국내기업이지만 국내브랜드 답지 않음', '외국 브랜드인 것처럼 세련되지만 너무 흔하지도 않음'이 그 답이라고 상희는 생각하였다.
생각이 한참 전개되고 있을때 갑작스러운 메신저 알람이 침묵의 밤을 깨뜨렸다.
'자문님, 오늘 제가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번 미팅 때 뵙겠습니다.'
김 실장이었다. 낮에 상희의 전화를 보고도 모르는 척 했던 그 모습이 떠올라서 괘씸했지만, 한편으로는 먼저 이런 메시지를 보내준게 고마웠다.
'그래요, 언제 커피라도 한잔 합시다.'
메시지를 보내놓고 대화창을 보니 상희와 김 실장의 메신저 소통은 정확히 1년 반만이었다.
김 실장과의 지난 메시지 창에는 요즘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광고다, 경쟁사가 이런 마케팅을 하고 있다라는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부터 지금 회의에 들어올 것, 지금 바로 광고비 대비 매출액을 확인해볼 것 같은 메시지를 주고받은 S사에서의 흔적이 가득했다. 대화창을 보며 지난 날이 아련히 떠올라 미소짓던 상희의 눈에, "줄기세포 크림"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줄기세포 크림이 임상시험 결과 경쟁사 대비 30% 이상 주름개선 효과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 어떨까?'
라는 상희의 질문에
'상무님, 임상시험이 사내 직원 40명 규모로 한거라 광고문안으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법무팀 검토도 약식으로 받았었는데 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합니다.'
라고 김 실장이 대답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상희는 아래처럼 답변했다.
'본부장님이 연구소 출신이신데, 말도 안되는 실험을 증거로 쓰라고 하신건 아닐거잖아. 그리고 법무팀이 하라는대로 하면 할 수 있는 마케팅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나 믿고 써요.'
줄기세포크림 광고 문안이나 마케팅에 대한 판단은 하나하나 분명 본부장이 했었는데 왜 마치 내가 판단한 것처럼 저런 식으로 답변을 달았을까. 상희는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봐도 저 당시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았고, 저런 판단을 스스로 내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 본부장이 본인을 엄청 몰아치던 시기에, 김 팀장을 안심시키고 빠르게 실행하기 위해 저런 식의 멘트로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그게 팩트일 것이다.
"아니 그럼 오늘 학부모회의는 어떻게 할건데."
한번도 자신의 옆에 있지 않는 엄마라고 불평하던 아이가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아침 밥상에서 아이는 짜증을 부렸다. 안그래도 잠을 이루지 못해 피곤한 상태였는데 아이까지 짜증을 내니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처음부터 오늘 갈 거라고 얘기를 하지 말았어야지, 괜히 왜 얘기해서 나만 쪽팔리게 만들어!"
"어머, 얘 좀 봐. 내가 언제 오늘 갈 거라고 했다는거야!"
"저번에 엄마가 오늘 가서 얼굴 도장 확실히 찍겠다고 했잖아! 왜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하냐고!"
아이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조용히 하라고 하는 바람에 집안이 조용해졌다. 아이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젓가락을 내려놓고 방으로 가버렸다. 그 순간, 상희는 과장 시절 모셨던 이 상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상무는 '머리보다 입이 빠른' 스타일의 임원이었다. 보고를 진행하는 순간순간 많은 것을 시켜놓곤 까먹기 일쑤였고, 퇴사 전 6개월 간은 그 증상이 더욱 심해져 본부장 보고 중에도 갑자기 왜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냐고 자신 밑의 팀장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비단 이 상무만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 만난 임원들도 본인이 시켰던 것, 혹은 본인이 해결하겠다고 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혹시 누군가에게도 내가 그런 임원으로 남은 것은 아닌가. 갑자기 상희는 불안해졌다.
"에밀리, 대행사에만 맡겨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내가 페르소나랑 브랜드 방향성을 정리해왔는데 같이 얘기 좀 해볼까요? 괜찮으면 대표한테도 보고하고 이에 맞춰서 마케팅 에셋(asset)들도 싹 정리해보죠"
집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마음 속이 다른 일들로 시끄러워도 일터에서 만큼은 프로페셔널해야 했다. 그게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의미라고 상희는 생각했다.
"그럼, 패션브랜드로 따지자면 에르메스, 구찌가 아니라 APC 같이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하지만 결코 저렴하지도 않은 느낌인거네요."
"빙고, 그렇죠."
에밀리도 이 방향성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이제 이에 맞춘 예시 이미지를 찾아보자고 김 실장쪽에 인풋을 줍시다"
어린 친구들에게도 공감을 얻는 마케팅 스토리텔링을 해내는 실력이라면 나이가 많아서 마케팅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상희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S사에 있을때는 본인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발버둥쳤는데, 지금은 이 어린 친구들에게 감과 실력이 녹슬지 않은 사람임을 보여주어야 한다는게 한편으로는 씁쓸하긴 했지만 말이다.
"클레어 자문님, 지금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지나가던 대표가 상희에게 왠일인지 말을 걸었고, 둘은 로비에 H커피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에밀리 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방향성 같은 거 많은 도움 얻고 있다고"
"그래요?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네"
역시나 H커피는 부드러웠다.
"저희 아시겠지만 마케팅 인력이 많이 부족해요. 작년까지는 제품에 집중하고 싶어서 제품 개발이나 바리스타 같은 친구들을 많이 충원했고, 올해 상반기에는 원두시장을 뚫어보려고 영업 위주로 많이 충원했거든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표가 잠시 망설여지는게 느껴졌다.
"근데 마케팅이 사람만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자문님처럼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인거 같아요."
젊은 친구들과 주파수를 맞추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희는 이곳에서도 전문가로 자리잡고 있었다. 역시 상희의 경험과 노하우는 녹슬지 않았다.
"그래서 클레어 자문님도 계시지만, MBA 동기였던 친구를 스카웃했어요. 아, 그 친구도 S사 다녔었는데. 혹시 아시려나?"
대표가 보여준 스마트폰 사진을 보니 상희도 낯이 익었다. 음료사업에서 디지털마케팅 팀장을 하던 친구였다. 상희에게 다른 부문의 팀장이었던 사람이 낯이 익는다는건 그 사람이 그만큼 일을 잘하고 임원들에게 어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기억나네요, 음료쪽에 있었던 친구인거 같은데."
"맞아요, 아시는구나. 다음달부터 CMO로 조인하기로 했어요."
대표와 말을 이어가던 사이, 커피는 식어버렸다.
"내가 여기 조인한지 3-4개월 정도 밖에 안된거 같은데 H커피가 그 짧은 사이에 엄청 커지네요."
"저희 같이 작은 스타트업은 기민해야 하니깐요."
그 기민함에 상희는 현기증까지 나는 것 같았다.
"회사 그만 두셨단 이야기는 들었는데 여기 계셨네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S사에서 온 박 팀장은 하얗고 세련된 얼굴에 말주변도 좋아 S사에서 다들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빼앗겼으니 음료사업 한 본부장은 가슴 꽤나 쓰렸겠다는 생각이, 박 팀장과 처음 인사하는 그 자리에서 들었다.
"지금 에밀리도 빠릿빠릿하게 잘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더 전문적인 친구들이 필요한거 같아서 5명 정도를 더 충원하려고 해요. 특히 디자인 같은 것도 대행사에만 맡겨놓을 순 없어서 디자이너들도 별도로 충원하려고 하고요."
순간 김 실장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게 좋겠네요. 아무래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영역은 대행사에만 맡겨놓을 순 없죠."
"그리고 에밀리 님한테 들었는데, 브랜드 페르소나 잡는 작업 같이 하고 계셨다고.."
"첫날부터 박 팀장이 일을 많이 하네. 맞아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먼저 이야기해주니 상희의 기분도 썩 나쁘진 않았다.
"그 작업은 이제 새로 오는 친구들이랑 함께 할게요. 직원들이 같이 만들어야 스스로들 그 철학에 공감하고 일을 더 맞는 방향으로 할 수 있으니깐요."
박 팀장은 웃는 얼굴로 대답하였지만 하고 있던 일을 그만하라 뜻이라는 것을 상희는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리 얘기인데요, 아까 말씀 드렸듯이 사람을 더 충원할 거라서.."
뒤에 따라오는 문구는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내용이었다. 자문에게 책상을 고정으로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H커피에서의 짧았던 역할이 이렇게 끝났다는 것을 상희는 직감하였다. 역할이 없는 직함은 의미가 없기에 자문도 그만 두겠다고 대표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짧게나마 함께 했던 친구들 - 에밀리, 김 실장, 직원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결국은 자리만 빼고, 필요할 때 미리 연락을 주면 회사에 출근하기로 하였다.
"S사 총무팀입니다. 김 상무님 차 반납일이 다음 주인데요, 계신데 알려주시면 기사 보낼게요."
그렇게 H커피에 두었던 짐들을 정리해서 들고 내려와 차에 시동을 켜는데 S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제 S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지막 물건도 보내주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 실장님. M마케팅사가 저희랑 1년 정도 같이 일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종합적인 브랜딩, 퍼포먼스 마케팅이 필요해서 조금 더 큰 업체로 입찰비딩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박 팀장은 거침이 없었다. 상대방이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도 가감없이 했다. 옆에 앉아있는 에밀리의 표정만 어두웠다.
"예, 그러시군요."
김 실장은 예견했다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클레어 자문님, 혹시 할 말 있으세요?"
아무 말 않고 있던 상희에게 갑자기 박 팀장이 화살을 돌렸다. 계약 종료를 통보하는 이 순간에 상희가 할 말이 무엇이 있으랴.
"김 실장님이랑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박 팀장과 김 실장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회의는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상무님, 오늘 저녁이나 드실까요?'
김 실장의 메시지였다. 이젠 상무도 아닌데, 회사를 먼저 그만둔 친구들에게 상희는 그 친구들이 회사를 그만 두었던 시절의 직급으로 남아있었다. 상희가 과장 직급이었을 때 이 상무 덕에 S사에서 퇴사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지금도 1년에 한번씩 만나면 상희를 '상희 과장'으로 부르곤 했다. 물론 상희도 그 친구를 '과장'으로 불렀다. 그 친구는 지금 작은 맥주 수입회사에서 임원 자리를 맡고 있었다.
윤기가 도는 후라이드 치킨에 거품이 가득한 생맥주. 상희와 김 실장이 S사에서 각각 팀장과 파트장으로 있을 때부터 자주 왔던 치킨 프랜차이즈는 술잔들을 부딪히는 소리로 여전히 왁자지껄했다.
"옛날 생각나네요. 그때 팀원들이랑 여기서 번개 회식 많이 했는데."
"맞아. 서운하게 나 빼고 한 날도 많은거 알고 있어."
"대신 그럴때는 다 제 개인카드로 결제한 것도 아시죠?"
그랬지. 김 실장은 이래서 직원들한테 인기가 더 많았었다.
"참, 수진과장 J어플에 갔어요. 얘기 들으셨어요?"
J어플이라면 화장품 정기구독서비스를 하는 스타트업이었다.
"거기선 과장이 아니고 팀장이라고 하니깐 수진 팀장이네요. 하하"
"결국은 스타트업들이 그렇게 인력들을 끌어당기는구나."
"그렇죠. 생각해보세요. 대기업의 그 답답한 기업문화, 정치질. 진짜 해야할 일보다는 쓸데없는데 공력을 낭비하게 하는 온갖 절차들. 그런 거 없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해보고 성공하거나 실패하는걸 용납해주는 문화가 스타트업들에 있잖아요. 자신 있으면 스타트업에 가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죠."
"대신 안정감이 없잖아. H커피처럼 외부에서 갑자기 누군가 오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밀리기도 하고. 오늘 보니 에밀리도 표정 어둡던데."
"대기업이라고 안정감이 있나요. 거기도 외국 어떤 기업에서 데려왔다, MBA한 사람이다 하고 데려와서 갑자기 임원, 팀장 자리에 앉히는 일도 비일비재한데."
하긴. 어떤 조직이든 사람 있는 곳은 다 비슷하다. 지금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에게도 결론적으로 대기업이 안정적인 곳은 아니었으니.
"그땐 뭘 그리 열심히 살았나 싶네요. 그래서 팀장자리 꿰찼다고 딱 1달 좋아하고 1년 내내 고생하다가 결국은 다 뒤집어 쓰고 불명예 퇴직했는데.."
결국은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구나. 상희는 김 실장과 한번은 이 이야기가 나올 것을 예견하였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장 본부장은 그대로 잘 지내신다면서요?"
"어? 그..러시지."
"그러시겠죠. 어쨌든 줄기세포 크림도 초대박까지는 아니어도 입소문은 괜찮게 나서 홈쇼핑에서 잘 나간다고 하던데."
김 실장은 맥주가 가득한 잔을 들더니 단숨에 절반을 마셔버렸다. 김 실장이 술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상희는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어 지난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상무님도 맨날 새벽까지 나와서 진짜 열심히 하셨는데. 그래도 상무님은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하셨으니 나름 성공한 인생이시죠."
"그런가?"
"그럼요. 솔직히 상무님이 어디 연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정치를 되게 잘하신 것도 아니고. 여자로써 진짜 나름 실력으로 가신 몇 안되는 임원이었잖아요."
김 실장에겐 본인에 대한 원망만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김 실장의 말에 상희는 놀라고 있었다.
"근데 그래서 아래에선 힘들었던거 아세요? 막 다른 임원들이랑 싸우고 오셔서 우리가 실무적으로 뒤에서 풀어야 하는 것도 많았어요."
"맞아. 그랬을거야. 아니, 사실을 다 알고 있었어."
"아니, 알고 계신 분이 그러셨어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김 실장은 웃고 있었다. 당시는 힘들어도 지나놓고 보면 추억이 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희도 김 실장을 따라 웃었다.
"자기들이 다 잘 할거라고 믿으니깐, 나도 앞에서는 막 지른거지. 그리고 솔직히 위에서 하라는거 혹은 옆에서 해달라는거 그대로 받아오는건 임원으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깐."
이라고 말하다가 상희는 갑자기 뜨끔했다. 김 실장과 나누었던 S사에서의 메시지가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뭐, 어쨌든 결국은 직장인의 결론은 이건가 보네요. 상무님은 자문님으로, 팀장은 실장으로. 하하"
김 실장의 자조섞인 웃음에 상희는 가슴이 저렸다.
"그래도 김 실장도 지금 여러 고객사 맡고 있는 광고 에이전시에서 잘 하고 있잖아. S사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가 다 헛된게 아니라니깐."
말한 스스로도 애써 달래보려고 한 이야기란걸 알았다. 하지만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와서 과거를 곱씹고 마음 아파하는건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사이 맥주잔을 비워버린 김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에 사드리지 못한거, 오늘 제가 갚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 내가 사야지.."
하지만 김 실장의 행동이 더 빨랐고, 그렇게 계산이 끝나있었다.
"아이고, 참. 오늘은 내가 사려고 한건데."
"아니예요. 얼마 나오지도 않았는데. 다음에 비싼거 얻어먹을게요, 김상희 상무님. 아니 클레어 자문님."
김 실장은 상희에게 90도로 인사했다.
"저는 저기서 담배피고 갈게요. 다음에 수진 과장까지 불러서 또 드시죠."
상희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김 실장은 담배를 문 채로 몸을 돌려 담배연기가 가득한 골목으로 향했다.
호프집들의 요란한 네온사인과 반쯤 취한 사람들이 가득한 그 거리에서 상희는 잠시 갈 곳을 잃고 서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희는 대리운전을 부르기 위해 스마트폰을 켰는데 그 순간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대체 지금 어디야? 아빠랑 다 걱정하고 있잖아."
"엄마가 다 미안했어."
"응? 뭐가?"
"그땐 내가 미안했어."
딸 아이의 전화기를 붙들고 상희는 입을 열었지만 상희의 시선은 사라져가는 김 실장의 등에 가있었다.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었던 거, 자기도 알지?”
마침 한참 바쁜 시간인지 대리기사는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김 실장이 사라진 골목길에는 여전히 흔들거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고, 다들 무엇에 그리 한이 맺혔는지 서로 목청을 높여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상희는 다음 주면 S사에 반납해야 하는 차 안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취기 때문인지, 오늘 있었던 일들이 서러워서인지 흐르는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