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라 부르면 꽃이 되는 신비
호칭이란 참 중요하다. 요즘 기술의 발전으로 AI가 데이터 통계로 이름을 만들어준다는 앱도 있던데, 개인적으로는 통감스러운 일이다. 주민등록을 하기 위해 급히 아무런 이름을 가져다 쓰는 부모들 이야기도 있지만 말이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들의 이름에 자신의 인생을 녹였다고 한다. 가끔 그래서, 신이 나를 버렸다 등의 의미를 가진 해괴한 이름도 등장한다. (애엄마가 되어보니 다시 한번 생각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화이다)
나무를 부를 때 우리는 이름을 부른다. 그냥 대상을 부르는 호칭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종종은 뜻을 생각하며 좋은 기운을 머금고 무럭무럭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게 된다. 남편 선배네 가족과 종종 만났는데, 그 집은 나무보다 6개월 정도 빠르다. 재밌는 건, 이 부부는 아이를 태명으로 부르는데 촌스럽고 귀여운 이름이 아주 입에 찰떡처럼 붙는다. 예쁘고 뜻 좋은 이름이 있지만, 입에 태명이 붙어서인지, 아님 그냥 부르기 편하고 귀여운 이름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계속 그 이름으로 부른다.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도 그렇게 자랐다. 3남 2녀의 오 남매 중 딸 둘은 제일 막내다. 워낙에 예쁘고 귀해서 어릴 적 이름 대신 예명으로 불렀단다. 혹시라도 누가 훔쳐간다고. 예명이란 개념도 참 재미있다.
그 시절 한 인생에 이름은 몇 개나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우선 태명이 있겠고, 본명에 예명에, 결혼하면 새댁, 누구 엄마 아빠, 회사를 다닌다면 주임, 대리, 과장, 차장, 부장 그렇게 승진할 때마다 불리는 말은 달라진다. 그리고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겠지. 태 중에서 한 생명이 되면 태명을 붙이고 사회적인 실존이 있기 전부터 한 개인의 인격이 탄생한다. 조금 확대해석하면,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한 생명을 정의하는 작업이지 싶다.
남편은 나를 늘 자기야라고 부른다. 싸울 때도 변함없다. 나는 어쩌면 이 사소한 단어 하나로, 언쟁이 고조될 때도 안정감을 얻는다. 나와 의견 차이가 있고, 심지어 양보하기 싫은 일이 있어 나와 다툴 때에도 이 사람에게 난 연인이자 반려이자 배우자이구나, 하는.
나무의 탄생과 동시에 나는 엄마로 불린다.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엄마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선 같은 게 생긴다. 남편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니까 조금 더 참아야지 하는 일도 있지마는 사실은 부모니까 조금 더 힘을 내보자는 건설적인 기분이 많다.
복직하고 나니, 다시 나는 대리가 되었다. 휴직 전에는 내가 팀에 막내라 사실 큰 감흥이 없었는데, 복직하니 사원인 팀원도 있어 괜히 대리라는 자리가 일하는데 신경 쓰인다. 귀찮은 자료 대충 복붙 하던 것도, 뭔가 자료다운 자료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 한번 더 만진다. 그때도, 지금도 똑같은 대리지만 자꾸만 누가 대리님 이것 좀 봐주세요 부를 때마다 무거운(?) 마음이 든다.
시덥잖고 새삼스럽지도 않은 발견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강력한 주문 같은 ‘부르는 말’, 이름은 한 인생에 참 많이도 붙는구나 싶다. 우리는 인지하지도 못한 새에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의 정체성을 쉴 새 없이 재정의 받는다. 그 지난한 세월을 살아가며 우리의 실존은 참 많은 간섭과 피로한 증명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새삼 그 과정을 잘 극복해가며 살아가는 나와 남편이 대견하다. 앞으로 그 과정을 살아갈 나무가 안쓰럽기도 하고 벌써부터 기특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