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 멋인지 영리한 것인지

나의 일을 찾아서

by Grace Hanne Lee

지금 다니는 회사는 굉장히 영업 지향적인 조직이다. 개발자 혹은 영업. 거의 이 두 부류의 집단으로 구성되어있다. 회사마다 마케팅의 위치가 다르긴 한데, 이 회사의 경우 ‘지원’ 조직에 속해있다. 내가 본 마케팅은 굉장히 범주가 넓어, 막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격이다. 영업과의 경계도 애매하고 지원 조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중에 내가 생각하고 하고 싶어 하는 마케팅은 영업과 적극적인 개입이 오가는 마케팅이다. 전략을 세우고 구체적인 기대 성과를 책정하여 테스팅을 통해 제품 매출에 기여하는 마케팅. 사실 브랜딩도 정말 좋아한다. 추상적인 영역이고 창의력과 대중 심리 및 기업/브랜드의 가치를 각각 객관적이면서도 깊은 이해로 분석한다. 다양한 매체나 콘텐츠로 대중 혹은 타깃 군에 기업이 필요한 이미징 작업을 한다.


하지만 이 회사는 그런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IT B2B 마케팅의 가장 뼈대스러운 퍼포먼스만 남아있고, 그마저도 조직 변동 등으로 인해 업무의 연속성이 떨어졌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는 업무는 내게 적잖은 스트레스였고, 일을 배워가며 진행하는 것은 속도도 굉장히 느려 일의 진척이 없어 보였다. 내가 아는 마케팅은 손이 많이 가고, 세밀한 기획으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것인데 이 곳에서는 그 작업마저도 속도감 있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진행된다.


최근 조직개편으로 17개 그룹사, 8개국의 해외마케팅 담당자는 나 혼자 남았다. 그마저도 나의 R&R은 40%가 마케팅, 60%가 사업개발이다. 한정된 인력 리소스라 업무의 깊이를 가볍게 두고 싶었으나, 해외법인 전체의 2분기 마케팅 기획을 2일 만에 보고하라는 미션을 받고 나니 현실 불가능한 꿈이려나 싶었다. 내 팀장과 실장님은 대화가 가능한 분들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업계에서 오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라 나와 견해가 많이 다르다. 그렇다고 내가 설득해서 꼭 이루고 싶은 의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 땐 우선 인내하고 한번 해보면서 답을 찾아보면 된다는 게 나의 철학이지만, 너무 정신없는 업무들에 지치긴 한다.


이쯤 되면 고개를 슬며시 내미는 친구가 있다. 이직의 과정이나 다시 적응하는 과정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잘 알면서도, 이쯤 되면 이 조직이 나의 커리어에 맞지 않으며, 여기서 고생만 하다 끝날 텐데 하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특히 아이가 있는 입장에서 이직은 굉장히 큰 부담이다. 집에서 이력서라도 쓸 시간도 빠듯하고 인터뷰 준비 등등이 수반되는 작업인데, 어쭙잖게 건들었다간 괜히 나만 축나고 끝날 수도 있다. 이직을 생각해봐야 할까? 지금이 나의 커리어를 위해 이동해야 하는 적기일까? 혹은 그저 화려한 이직 사이트들의 광고 속에 어렴풋한 겉멋 같은 게 들어, 진득할 줄 모르는 나의 조바심 같은 것일까?


나이가 들면 조금씩 현명해지고 사는 게 좀 방향성이 잡혀갈 줄 알았는데. 날로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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