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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Aug 14. 2020

태풍이 지나간 후

태풍이 지나간 후

     

  2018년 10월 5일, 강한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 콩레이가 한반도로 북상 중이라는 일기예보를 보면서도 12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태풍이 우리 가정을 휩쓸고 갈 것을 나는 예측하지 못했다. 10월 6일 새벽, 남편은 토요일 조기축구를 하러 간다며 주섬주섬 운동 가방을 챙겼다. 축구하는 순간이 제일 좋다던 남편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축구장으로 향했고 그날도 비올 때 공을 차면 더 재미있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렇게 나는 남편의 마지막 배웅을 했다. 태풍이 동반한 빗길에 남편의 차가 미끄러져 추락했고 그는 병원 이송 중 사망했다. 10월 12일, 22번째 결혼기념일에 나는 등 떠밀리듯 남편의 사망신고를 했다. 사람들은 다른 날 하지 왜 굳이 그날 했느냐 말하지만 잔인하게도 현실은 나를 그럴 수밖에 없도록 몰아세웠다. 믿기 힘든 일들이 잔인한 현실이 되었고, 나는 하루씩만 살아내기로 했다. 장례 후 열흘이 지나자 아이들을 학교로 돌려보내고 홀로 집에 남았다. 처음 1달간 난 밤마다 집안 이곳저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변기, 욕조, 싱크대, 베란다, 냉장고... 강한 세제 냄새가 집안 가득했지만 청소 외에는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나도 모를 낯선 감정들을 꾸역꾸역 삼켜야 했고, 가게 문을 잠그지 않고 퇴근하는 일이 몇 번씩 되풀이되었으며, TV 속 배우들의 대사가 시끄러운 소음처럼 붕붕거렸다. 시간이 지나 조금 정신이 들자 남편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남긴 메모와 그의 물건들 속에서 생전의 그가 품었던 고민과 생각들을 더듬어 보며 함께 있어도 온전히 그를 이해하고 품어주지 못했음을 뒤늦게 후회했다.  


  남편이 떠난 후 나는 이 땅에서 남편의 이름과 그가 살다 간 흔적을  지우는 일을 해야 했다. 누군가 해주었으면 싶은 일, 정말 내가 하고 싶지 않았던 그 일들은 그의 아내인 나만이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가족관계부에 인쇄된 남편의 이름 옆에 새로 쓰인 ‘사망’이란 두 글자가 날 선 화살이 되어 내 심장에 꽂혔고 나는 차마 남편의 이름 옆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모든 과정들이 지루하고 힘들고 복잡하고 지치고 화가 났다. 한 사람이 죽고 나면 이렇게 복잡하고 지루한 과정들을 거쳐야만 그의 삶이 정리되는 나라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실감했다.     

 

  새벽기도를 나갔다. “왜 나를? 왜 내게?” 라 물으며 화낼 곳도, 서럽게 울 수 있는 곳도, 애원할 곳도 그곳뿐이었다. 상실의 고통 앞에서 나는 얍복강의 야곱처럼 나의 신과 씨름을 하고 있다. 말간 얼굴로 시작된 기도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고 ‘당신이 저에게 이럴 수 없다’는 얄팍한 논리와 당위성으로 신을 몰아세우던 기도는 결국 애통함으로 무너지고 만다. 삶만큼이나 죽음 또한 아주 가까이 있는 것임을 또다시 마음 새김 당했다.   


  가을이 무르익기 시작할 때 남편이 떠났고 나는 길에 떨어진 낙엽 하나 마음에 담질 못했다. 지독했던 가을이 끝나갈 때쯤 언니 손에 이끌려 진안 마이산 엘 갔다. 예쁜 돌탑을 배경으로 언니들과 함께 찍힌 사진에서 나는 슬프고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낯선 여자를 보았다. 웃어도 울고 있는 슬픈 표정, 지친 머리카락과 그늘진 얼굴, 내면의 슬픔을 입에 담아 말하지 않아도 사진 속 나의 모습이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을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매일 출근을 하면서도 나는 제대로 거울을 보지 않았나 보다. 내 모습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마이산에서 돌아온 다음 날, 2층 미용실로 올라갔다. 장례 후 한 동안 울컥하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나는 미용실로 올라가서 원장 품에 안겨서 울었다. 그녀는 사별 15년 차였고 언제나 아무 말 없이 우는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미용실 동생에게 말했다.

“나 좀 어떻게 해줘! 슬퍼 보이지 않게 나 좀 다르게 보이게 해 줘.”

미용실 동생은 그날 저녁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았다. 오직 나와 그녀 둘이서만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마를 하며 서로가 가진 사연들을 주거니 받거니 나누며 울고 웃었다. 다음 날 나는 화사하게 화장을 하고 거울 앞에 섰다. 선머슴처럼 짧게 자른 머리와 붉은 립스틱을 바른 내 모습이 맘에 들었다. 거울을 보며 활짝 웃어보았다. 처음엔 입만 웃지 눈이 웃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 연습했다. 눈이 웃을 때까지.... 나의 모든 안면근육이 웃을 때까지... 그리고 셀카를 찍어서 가족 톡방에 올린 뒤 나 어때? 나 너무 예쁘지 않아?"라고 문자를 보냈다.      

도레미파솔.. 솔솔솔 ~ 음악시간처럼 솔까지 음정을 높인 뒤 솔에 맞추어 " 안녕! 안녕! 안녕하세요!" 연습했다. 목소리에서 슬픔이 빠질 때까지... 다시 또다시 연습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안녕, 엄마야! 아침 먹었어? "


  남편의 사고 후 생각을 멈춰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온 그 어느 시절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한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글을 쓰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특별한 여행사진을 남기듯 나는 상실이 주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발견하며 어떻게 달라지는지 기록하고 싶어 졌다. 기록을 하려니 나는 둘로 갈라진다. 슬픔과 현실에 절망하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 나는 카메라 대신 펜을 들고 나를 사진 찍기 시작했다.     


   2018년 10월 6일 이후 내 삶에서 사라진 것은 남편뿐이고, 나머지는 전과 동일한 세상이다. 나는 여전히 같은 곳에서 일하고, 같은 집에 살며, 같은 친구들과 교제를 나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내가 되어간다. 사별한 누군가에게 “힘드시죠? 힘을 내세요!”라고 하는 나의 말은 남편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달라진다.  같은 어휘지만 그 안에 스민 이해의 무게가 다르다. 나는 이제야 겨우 고통을 품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진짜 언어를 배워가고 있는 듯하다.      


  남편이 떠난 후 나는 많은 이들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위로를 받았다. 각 사람의 성품과 형편, 친분의 정도에 따라 위로의 방법도 달랐다. 많은 위로가 슬픔을 극복하는 힘이 되어 주었기에 점수를 매겨 순위를 말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나를 찾아와 타인에게 말하기 힘든 자신의 깊은 아픔을 고백하며 고통을 함께 나눈 분들을 통해 나는 나의 슬픔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그들 모두 상실의 시간을 보냈고 고통을 받았다. 누군가는 건강했던 아들과 그 아들에게 품었던 엄마의 소망을 잃었고, 누군가는 부모에게 버림받음으로 따뜻한 가정과 행복해야 할 10대를 잃었다. 누군가는 남편의 도박중독으로 재산과 남편을 향한 신뢰를 잃었고, 젊어 사별한 노부인은 홀로 자녀를 키우느라 자신을 위해 살아볼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고백함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처럼 상실이 주는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나도 당신이 걷는 그 광야를 걸었으며, 당신처럼 광야를 지나는 중입니다.  

 당신은 혼자 광야에 버려진 것이 아니며 혼자 그 광야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광야의 어딘가를 나도 걷고 있습니다.”     


  나의 상실과 슬픔에만 집중해 있을 때 나의 슬픔과 고통은 거대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상실과 아픔을 깊이 마주할수록 거대했던 나의 고통과 슬픔이 점점 작아진다. 타인의 아픔을 통해 위로 얻는 내가 위선적이고 이기적으로 느껴져 부끄럽지만 솔직히 나는 그들의 아픔을 깊이 마주하면서 위로를 받았고 내가 혼자 광야에 던져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세상의 허다한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심한 상실의 고통을 견디며 극복해가고 있고, 나 또한 이 땅에서 고통받는 허다한 무리들 가운데 단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유별나게 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들을 통해 애통하는 가운데 광야를 건너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상실의 슬픔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홀로 걷는 외로운 광야는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에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상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확인하고, 슬픔 중에 기쁨과 즐거움을, 고통 중에 감사를 찾아보려 한다. 신은 내가 지나야 할 광야에도 보물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얼마 전 분홍색 티셔츠를 샀다. 분홍색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나는 다시 눈빛까지 환하게 웃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또다시 도레미파솔~~~~  솔에 맞추어 솔솔솔 을 세 번쯤 노래한 후 거울에게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러면 거울 속에 환하게 웃는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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