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사별후 내가 알아 가는것 1)
나는 기독교인이다.
변덕스러운 성품만큼이나 신을 향한 마음과 열정도 롤러코스터처럼 높낮이가 있어서 항상 신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닮은 제자처럼 행하지 못하고 살 때가 더 많으니 (고) 이태석 신부님처럼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품은 자라 말하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역시 기독교인이다.
남편의 장례식에서 40년 지기 친구가 망연자실한 나를 부둥켜안고 말했다.
“ 하나님이 너를 어찌 쓰시려고 자꾸 너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모르겠구나.”
그 순간 친구의 말이 삼켜지지 않는 음식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친구의 말에 화가 났다.
‘하나님의 계획에 나를 쓰기 위해 신께서 내게 이러시는 거라면 난 거절입니다. 당신은 내게 공평치 않았고, 나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이 계획하신 모든 일에 난 1%도 협력하지 않을 겁니다.’
신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난 두 눈을 부릅뜨고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세상 앞에 창피했다. 10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20살에 엄마와 할머니를 한날에 잃고 한 순간 가난한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나이 오십도 되기 전에 남편을 잃고 이제 과부가 되었다. 부모복도 없는 자가 남편복도 없으니 믿음으로 복을 누리는 자라 말하기엔 내 삶이 너무 애처롭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부터 나는 새벽기도를 나갔다. 그리고 울었다.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 날은 숨죽여 울었고, 어느 날은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횡설수설 말이 되지 못하는 소리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나의 새벽은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을 향한 나의 전투였다. 나는 하나님께 독이 든 언어로 대들기 시작했고, 나의 모든 원망과 분노의 독화살은 하나님을 향해 날카롭게 날아갔다.
“ 구구절절한 내 인생이 부끄럽고 창피해서 세상 앞에 설 수가 없어요. 나는 계속 당신 앞에서 울 것이니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이제 당신을 향해 이렇게 말할 겁니다. ‘ 하나님 앞에서 우는 그녀의 인생이 참으로 가엽고 애처롭구나! 그녀의 하나님은 그녀의 삶을 보호하시기는커녕 냉혹하게 그녀를 다시 상실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어. 전능한 하나님은 그녀에게 관심이 있긴 한 것인가? 그녀의 하나님은 과연 선한 전능자인가? 그녀의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아무리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우리의 고통을 하찮게 여기거나 관심조차 없다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 영혼을 고통 속으로 우습게 던져버리는 신이라면 누가 이따위 하나님을 믿을까요? 내가 불쌍하고 초라해진 것처럼 당신도 무능하고 초라해져야 합니다. 내가 아픈 것처럼 당신도 아파야 합니다. 당신이 진정 나의 아버지라면 당신은 나와 함께 울어야 합니다.”
남편이 죽고 난 후 나는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매일 화가 났다. 그의 죽음은 살아 있는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난 세상에 화가 났다. 남편에게도 화가 났지만 죽은 사람은 내 원망을 듣지 못했다. 사는 동안 그를 더 귀히 여김으로 사랑해주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에 신이 있었다.
“왜 또 나입니까?” 나는 또다시 나를 상실의 고통 속으로 처박은 냉혹한 하나님의 주권에 화가 났다. 47살에 또다시 겪게 되는 사랑하는 이의 사고와 죽음은 내 안의 잠자고 있던 상실의 기억에 새로운 불씨가 되고 더 큰 고통으로 나를 태우고 내 안의 하나님을 불사르고 싶어 했다. 고통은 나의 믿음을 절망과 의심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신는 내게 변명하지 않았고, 내 분노 앞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는 그를 비웃고 의심하는 나로 인해 초라해졌고 모욕당했으며 상처 받았다. 부모도 없고, 남편도 잃은 가련한 나는 이젠 오랜 세월 의지하고 신뢰했던 하나님마저 잃을 위기에 놓였다. 이제 나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나는 고통으로 탄식하는 욥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얍복강의 야곱처럼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했다. 말간 얼굴로 시작된 기도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고, ‘당신이 나에게 이럴 순 없다’는 얄팍한 논리와 당위성으로 시작된 기도는 매일 애통함으로 무너져 내렸다. 상실의 고통과 분노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불신이 자라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나에게 질문했다.
“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다면, 또 하나님이 나와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치부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하찮게 여겨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불신과 부정이 날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분노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오랫동안 쌓아온 나의 믿음을 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싶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것도 서러운데 거기에 더해 하나님을 잃고 영적 고아가 될 순 없었다. 나는 하나님이야말로 상처 받은 나와 우리 가정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초가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결국 나는 무신론자의 땅이 아닌, 믿음으로 신의 광야를 걷기로 작정했다. 나는 신이 왜 나로 하여금 두렵고 외로운 이 광야를 걷게 하는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또한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묵상할 때 나는 위로를 얻는다. 주권자이셨지만 그는 자신에게 다가올 상실을 막지 않으셨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상실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우리를 대신해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으며 스스로 고통을 겪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으로 신음하는 예수님의 절규에서 나는 하나님의 눈물을 본다. 또다시 겪게 되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별 자이며 상실의 고통으로 울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나에게는 위로가 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분노한다. 그분도 나처럼 분노했던 적이 있으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서 가면은 벗고 아이처럼 운다. 그분도 나처럼 울었던 적이 있으니까.
상실의 고통과 절망에 갇혔던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로 인해 위로를 얻고 절망을 털고 일어나 사명자가 되는 모습과 믿음과 소망으로 천국을 약속하셨기에 남편이 천국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나에겐 큰 위로가 된다.
날이 거듭될수록 분노로 시작된 나의 새벽은 애통함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으며 결국엔 기도가 되기 시작했다. 성경에는 많은 애통하는 여인들의 기도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약속이 있다. 이스마엘을 품에 안고 사라에게 쫓겨난 하갈, 자식을 낳지 못해 애통하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오빠 나사로를 잃은 마리아와 마르다, 혈우병을 앓는 딸의 어머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상실을 통해 나는 애통하는 여인중 하나가 되었고 애통하는 자의 기도를 배운다.
기도를 통해 나는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다. 그러므로 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여전히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이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