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디디아 Aug 23. 2020

외로움이 변하여 꽃이 되길


남편이 죽고 3달쯤 후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네가 지금 마음을 다잡고 잘 견뎌줘서 다행이긴 한데 한두 달 지나면 네 마음이 무너질 수도 있어. 아는 언니가 5년 전에 사별을 했는데 초반에는 너처럼 멀쩡해 보이더니 몇 달 지나 무너지더라.”

나는 나를 염려하는 친구의 말이 고맙기는커녕 반감이 들었다.

넌 지금 내가 멀쩡해 보이냐? 점점 더 좋아질 거라고 말해줘도 시원찮을 마당에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말해주면 날더러 어쩌라고? 무너질 마음을 대비해 마음 저축이라도 해야 되나? 누군가에게 내가 무너질지도 모르니 잘 지켜봐 달라고 혹 무너지면 일으켜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란 말이야? 아니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하루를 버티어 살아내는 것 외에 스스로 마음을 감시하는 보초라도 서야 하나?’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었다.  
 
처음 친구의 염려를 들었을 때 다소 짜증이 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녀의 우려가 무슨 말인지 차츰 이해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망 후 처리해야 할 법적인 문제들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니 또 다른 힘든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사별 후 힘들어지는 이유는 처한 환경과 성품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들어지는 건 왜일까 생각해보니 내 경우의 답은 외로움이었다. 처음엔 믿기 힘든 현실에 대한 당혹감과 떠난 배우자에 대한 그리움, 혼자 살아갈 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힘든 시간이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거기에 외로움이란 감정이 더해졌다. 불편한 감정들이 곱해지니 나는 복잡한 감정과 내면의 혼돈에 당혹스러웠다.


외로움은 나를 참 당황스럽게 만든다. 내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이 감정에 휘둘려 평소 내가 하지 않던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진짜가 아닌 야릇한 감정을 만들어 내고 마음을 흔들며 판단을 흐리게 했다. 사별 후 약해진 마음을 이용하는 선하지 못한 사람들이 접근하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지인들에게 받은 적이 있는데 사별 후 나는 제일 위험한 사람과 같이 지내고 있었다. 이성적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적이 돼가는 사람, 나를 수령에 빠뜨릴 수도 있고 내게 가장 크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사별 후의 나를 관찰하며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과 벌이는 전쟁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외로움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스러웠고 외로움이란 감정 때문에 내가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렇다면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외로움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심리 전문가도 아닌 내가 하나의 문장으로 외로움에 대한 평균적 정의를 내리긴 어렵지만 나의 외로움은 '내가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무언가를 공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에 가깝다. 나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또한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다. 생각이 같고 다름을 떠나 한 공간에 함께 있을지라도 무언가를 공유하고 나눌 수 없는 상태일 때 나는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나와 남편이 서로의 전부를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명 우리는 가장 많은 부분을 공유했던 특별한 관계였다. 그를 잃은 것은 꽃이 피고 지는 풍경이나 밥을 먹는 일 같은 매일의 사소함을 공유했던 친구를 잃은 것이니 그가 떠난 후 내가 감당해야 할 외로움은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깊고 어두운 우물과 같다. 사별 후 한동안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청소를 하고 더 많은 운동을 했다. 늦은 밤까지 오프라인 강의를 들었고 주말마다 지인들과 약속을 잡았다. 새벽 5시 30분 기도로 시작된 하루 일과는 보통 밤 10시가 넘어야 끝이 났고 지쳐 잠들기를 반복했다. 일찍 귀가한 저녁은 제일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런 날이면 난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고 공허한 수다를 나누곤 했다.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적도 있지만 그 시간을 견디기엔 누군가의 목소리라도 필요했다. 사별 후 몇 달 동안 나는 남편과 공유했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남으로 마주하기 싫은 외로움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남편이 떠난 지 500일이 지났다. 이제 나는 도망치는 것을 멈추고 외로움을 껴안아 보려고 한다. 혼자라고 항상 외로운 것도 아니고, 죽을 만큼 외롭지도 않다. 또 누군가는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자발적 외로움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니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짓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 도망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독신으로 혼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외롭진 않아? 외로울 땐 어떻게 해?‘라고 물은 적이 있다.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순간이 있지. 난 외로울 땐 길을 걸어. 혼자 여행을 가서도 보통 길을 걷는 편이야. 근데 난 혼자 있는 게 슬프거나 불편하지 않아. 오히려 타인과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생활이 나에겐 더 부자연스럽고  부담스러운 삶이야. ”

나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독신인 친구와 사별한 나는 둘 다 혼자 산다. 하지만 우리의 홀로인 시간은 아직 다르다. 나의 시간은 아직 외로움에 가깝고, 친구의 시간은 홀로 움 (홀로 사는 즐거움)에 가깝다. 나는 남편과 공유함을 통해 누렸던 행복의 기억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의 외로움을 홀로움으로 바꾸는 노력을 하려 한다. 나는 일과 약속을 줄이고 의도적으로 혼자인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홀로인 나는 전보다 더 오래 기도하고, 더 깊이 묵상한다.  나는 더 자주 악기를 연습하고 더 많은 노래를 알아간다. 나는 전보다 더 책을 읽고 더 깊은 글쓰기를 한다.  홀로 된 나는 전보다 더 자주 슬픔을 겪는 지인들과 연락을 하고 그들의 하소연을 듣는다. 나는 혼자 산에 오르지만 나무 사이로 비치는 파란 하늘을 더 오래 바라본다. 홀로인 나는 더 깊게 자신을 마주하며 내가 진정 원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 안에 숨겨진  열정과 재능, 그로 인해 내가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일들을 자각한다. 인생을 혼자 살아가는 것은 분명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즐겁지는 않다. 하지만 혼자임을 피할 수 없다면 홀로움을 익힐 필요가 있다. 사물에 대한 감수성을 높인다면 혼자일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고, 외로움에서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사는 것이 혼자임을 인정하고 홀로움을 누릴 줄 알게 되면 타인에 대한 기대를 줄일 수 있다. 기대가 작아지면 실망도 줄고 마음은 더 평온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혼자인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사회적인 사람이고, 혼자 보다는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어쩌면 외로움을 해결하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이 제일 어렵고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여러 사람으로 확장하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나는 사별 후 한 사람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던 특별한 관계와 충만감을 잃었다. 하지만 내 삶을 다시 보면 여전히 삶의 일부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과 동료, 가족이 남아 있었다. 한 사람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특별한 관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한두 가지를 공유할 수 있는 여러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면 내 삶은 소외된 혼자가 아닌 여전히 누군가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어떤 친구와는 함께 산을 오르고, 또 다른 친구와는 벚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풍경 속을 을 수도 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사별 후에도 여전히 여행을 다닌다. 사별 전에는 대부분 여행에 남편이 동행이었다. 사별 후 나의 여행은 전과 다르다. 여행마다 동행이 달라지니 여행의 모습과 대화도 달라지며 여행의 즐거움도 달라진다. 나의 여행은 전보다 더 다채로운 색깔을 품게 되었다. 요즘 나는 ‘함께 하시겠어요?’라는 사람들의 제의에  ‘Yes'로 대답하는 빈도가 늘었다. 그로 인해 내 삶은 전보다 분주해졌지만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면서, 봄의 새순처럼 새로운 관계가 내 삶 속에서 싹트고 자라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사별 초 나를 짓누르던 커다란 외로움의 무게를 작아지게 한다.  


 홀로움을 알아가는 노력을 하고, 한 사람과 많은 것을 공유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내려놓고 여러 사람과 삶을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니 비로소 내 마음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나는 마음 문을 반쯤 열어두며 살 생각이다. 사는 날 동안 봄바람의 꽃잎처럼 내 풍경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보고 싶어 졌다. 배우자가 아닐지라도, 삶의 전부를 공유하진 못할지라도,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진심으로 사람을 마주할 줄 아는 사람과 인생의 찰나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아름다운 찰나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의 외로움이 당당한 홀로움이 되고 아름다운 함께함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