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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Aug 25. 2020

사별 후 1주기 추모식

  가을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남편은 홀연히 내 곁을 떠났다. 그는 집을 나가면서 나에게 “다녀올게”라고 말했지만 해가 뜨고 지는 하루가 1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무덤 위로 낙엽이 지고 눈이 쌓였으며, 다시 노란 민들레가 피어나고 듬성듬성 심었던 잔디가 무덤을 가득 덮도록 그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땅에 묻은 후 나는 이 세상에서 그의 이름 세 글자를 묵묵히 지워 나갔다. 오십여 년 그토록 애쓰며 살았던 한 남자의 이름과 기억이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시간은 그가 사느라 애쓴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짧았다. 나는 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천천히 잊히길 바라며 그가 있는 사진들을 내 SNS의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적어도 1년은 그가 속했던 세상이 그를 그리워하고 기억해주길 바랬다. 여름이 끝날 무렵 남편의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그간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다가올 남편의 1주기 추모식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는 남편의 1주기 추모식을 어떻게 지낼 계획인지 물었고 남편의 교회 친구들이 1주기 추모식에 가족과 같이 참여해도 되는지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여전히 남편을 기억하며 그를 추모하기를 원하는 남편의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으므로 기꺼이 허락했다. 그는 추모예배와 관련된 모든 절차를 알아서 준비할 테니 조금도 부담 갖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길 당부했고 따로 가족들이 원하는 것이 있는지 의견을 물어본 뒤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상의하기로 했다. 혼자 어떻게 1주기 추모식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마음만 분주했는데 나로서는 큰 부담을 덜 수 있어 감사했다. 그래도 역시 아내인 내가 챙겨야 일은 많았다. 양가의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 1주기 추모식에 대해 개별적으로 알린 후 참석여부를 확인해야 했고, 참석 인원을 파악한 뒤 추모식과 식사 장소도 결정해야 했다. 한 달 동안 그의 1주기 추모식을 준비하면서 나는 우울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거듭 다 잡으며 약속과 일에 파묻혀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9월이 가고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년이 지나 다시 그 날이 되었다. 1년 전 그날은 태풍이 불고 비가 많이 내렸는데 1주기엔 파란 하늘과 햇살이 더없이 좋은 가을날이었다. 난 검은 옷을 입긴 했지만 밝게 화장을 했다. 그리고 딸에게도 “우리 예쁘게 하고 가자”라고 말했다. 그의 추모식에 다시 모인 사람들은 누구보다 우리 가족을 사랑하며 염려하는 사람들이다. 그가 없어도 나와 아이들이 밝게 살아가길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고마운 그들과 혹 자신의 추모식을 지켜볼지도 모를 남편에게 나는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추모예배는 남편과 오랫동안 ‘장애인 청소년부 예배’를 같이 섬겼던 목사님이 맡아 주셨고 많은 분들이 남편의 묘를 중심에 놓고 1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아들은 추모식에 오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글로 전해왔다.     


오늘 아빠의 1주기 추모식에 와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드리고 싶은 감사의 말이 많아요한 사람의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고 하잖아요아빠의 주변에 이렇게 좋은 분들이 많은 걸 보면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힘들 때 항상 위로해주시고좋을 때 함께 기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비록 오늘을 슬픈 일로 모였지만 분명 아빠는 여러분이 웃으며 돌아가길 원하실 거예요아빠는 우리가 웃는 걸 좋아하셨으니까요아빠가 우리에게 유언을 남기시진 않았지만아빠가 없어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시는지 저희는 이미 잘 알고 있어요아빠의 바람대로 앞으로도 열심히 바르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저는 제가 아빠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요지금 우리 앞에 계시지 않지만 아빠는 제 안에 그리고 여러분의 기억 속에 계실 겁니다앞으로도 아빠를 기억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지내요특별히 저희 엄마와 함께 해 주셔서 또한 감사드려요돌아가시는 길 조심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추모식에 오신 분들과 미소로 인사를 나누었지만 아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울컥했다. 목사님이 기도와 말씀을 나눈 후 “내 주를 가까이”라는 찬양을 내가 팬플룻으로 연주했다. 남편이 죽기 1년 전부터 나는 팬플릇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가 죽고 난 후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 동안 팬플릇을 불곤 했다. 남편은 살아생전 내 팬플릇 연주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죽은 그가 나의 연주를 들을지 알 순 없지만 나는 그에게 정말 멋진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다. 절대 울지 않으리란 다짐에도 불구하고, 간주가 흐르는 사이 영정사진 속 그의 미소를 보자 나의 다짐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팬플릇 관으로 흘렀고 연습한 보람도 없이 나는 흔들리는 호흡으로 간신히 연주를 마쳤다. 흔들리는 팬플릇 소리는 나의 마음을 백 마디 말보다 더 잘 표현했는지 추모식에 모인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각자의 추억과 애기를 들려주었다. 첫 번째 나눔은 딸아이가 “아빠는......”으로 시작했다. 딸이 밝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풀어내는 아빠에 대한 추억에 우리는 다 같이 소리 내어 웃었다. 딸은 아빠가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과 헌신을 기억하며 아빠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꼭 기억하겠노라고 말했다. 남편의 친구와 지인들도 돌아가면서 그와 관련된 추억을 들려주었다. 어떤 애기는 아는 것이고 어떤 사연은 처음 들었다. 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상황 속 남편의 표정과 몸짓, 그의 언어와 웃음이 영화처럼 그려졌다. 남편의 친구가 고백했다. “그가 없으니 삼행시 짓기도 없고, ‘밥 사’라는 사람도 없고 단톡 방 수다와 축구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내가 그 친구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 알았습니다. 친구가 많이 보고 싶네요.” 친구의 회상과 고백이 끝나자 다른 친구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형부는 집안에 쌍둥이가 태어난 얘기를 하시면서 “동서가 있었다면 분명 많이 축하하고 좋아해 줬을 겁니다. 동서는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해주는 사람이었죠. 쌍둥이를 보면서 참 좋아라 했을 그가 선하네요.”라며 그와 기쁨을 함께 할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어떤 이는 그와 나눈 특별한 대화와 추억을 들려주며 그를 가슴 한 곳에 곱게 접어 간직하겠노라고 말했다. 시숙님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 동생의 모습을 들려주셨고, 오늘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생이 좋은 사람들 속에서 따뜻한 삶을 살다 간 것 같아 위로가 된다고 하셨다. 우리는 서로의 추억과 그리운 마음을 나누면서 그를 생생하게 다시 떠올릴 수 있었고 같이 울고 웃었다. 죽은 지 1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를 추모하며 그를 보지 못하는 슬픔으로 같이 울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나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살아생전 그가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았고, 죽어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겨진 것이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추모식이 끝나고 많은 이들이 나를 품에 꼭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고맙다. 수고했다. 애셨다. 장하다.” 나는 그 말에 담긴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품에서 웃었고 울었다.      



남편의 1주기 추모식을 지낸 후 나는 그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그가 살아낸 생의 반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보냈고 그와 많은 것을 공유한 그의 유일한 아내였다. 그는 옳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때로는 틀렸고, 확신하는 삶을 원했지만 세상은 그를 흔들었다. 그는 성실했지만 때로는 절망했고, 그는 신실했지만 때로는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는 배려심이 좋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는 그의 삶이 완벽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부터 1주기 추모식까지 1년 동안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마주하며 그의 삶을 다시 곱씹어 생각해보니 그는 제법 괜찮은 삶을 살아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산다고 꼭 좋은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위기에서 구하거나 특별한 업적을 세우지 않았어도 누군가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쳤고 기쁨과 감사의 이유가 되는 삶이었다면 그 삶은 충분히 좋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길지 않은 생을 살았지만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하고 따뜻하고 즐거운 위로를 주는 사람으로 기억된 채 생을 마감했다. 누군가는 그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지금도 나와 아이들을 돌보고 안부를 묻는다. 나는 그가 없는 그의 장례식과 추모식에서 그를 향한 뜨거운 눈물을 보았고 애통하는 울음을 들었다. 사람이 죽고 난 후 그가 속했던 세상에서 이 만한 슬픔과 그리움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았다면 충분히 좋은 삶이었고, 그의 아내로 살았던 나의 삶도 더불어 괜찮은 삶이었다. 그러니 더 오래 살지 못한 그를 불쌍히 여길 일도 아니며 그와 더 함께 하지 못하는 현실을 억울해할 일도 아니다. 그의 삶이 여기까지로 족했다면 그와의 인연도 이것으로 족하다. 


그를 추모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1주기 추모식을 치르면서 나는 큰 위로를 얻었고,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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