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42살, 엄마는 41살 난 10살이었다. 아침에 아버지께 등교 인사를 드렸는데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당시 우리 집은 학교 수업료도 제때 납부하지 못할 만큼 가난했고 41살의 엄마는 하루아침에 시어머니와 5남매를 홀로 부양해야 하는 세대주가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최종학력인 엄마는 6명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큰 짐 자전거로 우유를 배달하셨다. 엄마는 오랫동안 엄마의 이름 대신 “해태(우유) 아줌마”로 불리셨다. 엄마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해서 밤 9시가 넘어야 끝이 났다.
남편이 죽고 검은 상복을 입은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 나 어떻게 하지? 나 어떡하면 좋지? 엄마가 어떻게 했더라? 엄마...'
남편이 죽은 후 난 엄마가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계속 생각했다.
'엄마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억해 내. 엄마도 해 냈다면 너도 할 수 있어. 엄마가 그 세월을견디셨으면 너도 충분히 견딜 수 있어. 넌 그 엄마의 딸이니까. 게다가 넌 엄마보다 많이 배웠고 엄마보다 가진 게 많지.'
엄마가 돌아가신 지 28년이 넘었지만 나는 어느 시절보다 더욱 엄마에 대해 기억해내고 싶었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엄마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새벽부터 우유배달을 나가셨다. 4단으로 우유를 쌓고 짐바로 묶은 짐자전거는 작은 체구의 엄마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무거웠다. 겨울 찬바람 속에서 무거운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서 엄마는 매일 하염없이 울었다고 하셨다.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렸을 엄마의 볼은 그 겨울에 얼마나 시리셨을까? 남편을 잃은 41살 가난한 그 여인은 다섯 아이의 엄마로 홀로 살아갈 일이 얼마나 무섭고 암담했을까? 나는 엄마의 처지가 되고 나서야 엄마의 언어, 엄마의 눈물과 외로움, 엄마의 치열했던 삶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언니들은 막내인 내가 엄마의 슬프고 서러운 시간들을 되짚어가는 것이 마음 아파서 속이 상한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한 사람은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엄마가 계셨다면 '엄마 딸이어서 참 좋았어'라고 말한 뒤 엄마를 꼭 안아 드리고 싶다.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상실의 시간을 통해 나는 비로소 그녀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엄마의 딸이 되어 간다.
온라인 사별 카페에서는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 초엔 배우자를 잃고 혼자 키우고 있는 어린 자녀들이 사회에서 한부모 가정이라고 차별당하거나 상처 받지 않을까 염려하는 글을 자주 보게 된다. 어찌할 바 몰라 힘들어하는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5남매의 엄마였던 가난한 41살 나의 엄마를 보았다.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마음이 이런 거였구나! 아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말라던 엄마의 말속엔 이런 마음저림이 있었겠구나.'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자녀들이 걱정되는 많은 분들에게 나는 아빠 없이 자란 나의 어린 시절 일부를 들려주고 싶다.
12살 때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작은 언쟁이 생겼다. 언쟁에서 밀린 남자아이가 지는 것이 억울했던지 내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해 버렸다.
“아버지도 없는 게 어디서 까불어!” 그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남자아이는 아차 싶었는지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도망치는 그 녀석 뒤를 있는 힘을 다해 쫓아갔다. ‘너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우리는 1시간이 넘게 동네를 벗어나 논과 밭을 지나 철길 너머까지 도망치고 뒤쫓았다. 나는 그날 그 녀석을 잡지 못했다. 1시간을 넘게 걸어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집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벌게진 얼굴의 눈물자국을 닦으며 말했다. ‘ 빨리빨리 하얘져라. 엄마랑 할머니가 보기 전에 빨리빨리 멀쩡해져라!’ 주문을외우면서 만화 캔디의 주제곡을 불렀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12살 소녀는 노래를 부르며 다짐했다.
‘앞으로 아버지도 없는 게라는 말로 누구도 나를 얕잡아 보지 못하게 할 거야! 적어도 그 녀석보다는 똑똑한 사람이 될 거야!'
그날 이후 소녀는 혼자서 눈물을 닦을 줄 알게 되었고, 허접한 사람들이 절대 무시하지 못할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자상하고 다정한 아버지를 가진 친구들을 보면 한없이 부러워서 질투가 났다.
소녀는 아무리 용을 써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며 내려놓는 법도 배웠다.
‘괜찮아! 난 엄마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언니 오빠들도 있잖아! 아직도 내 편이 많은걸.’
엄마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하시니 우리 형제들은 일찍부터 자기 일은 스스로 책임졌고 가사도 분담했다. '자기 빨래는 자기가'라는 원칙으로 5학년 때부터 내 빨래는 내가 해야 했다. 어린 소녀는 빨래, 청소, 바느질, 설거지 등 할 수 있는일은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배우며 부지런함을 몸에 익혔다.
15살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여름, 오빠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나는 소녀를 불러놓고 진지하게 엄마 애기를 꺼내놓았다. 나는 엄마라는 말에 약한데 오빠가 급소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오빠는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는 엄마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냐? 마음 말고 현실적으로 네가 엄마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덜어낼 수 있는지 생각해봐!”
나는 그날 밤 엄마를 생각하며 철없는 나의 행동을 후회했고 새벽까지 울었다. 사춘기의 방황은 그렇게 끝났고 내가 세운 새로운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엄마와 나를 위해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답은 명확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살아있던 10년 동안 나는 엄마의 기쁨과 자랑이 되고 싶었고 엄마에게 힘을 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엄마를 위해서 내가 했던 모든 노력들은 결국 다시 내 삶으로 돌아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 비웃음 당하지 않게 살라며 자식들에게 뼈아픈 말을 하셔야 했던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드리고 싶다.
“엄마! 나 아버지 없어도 씩씩한 엄마가 있어서 행복했고 잘 자랄 수 있었어. 엄마 고마워.”
‘나 혼자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를 염려하는 많은 한부모 가정의 엄마와 아빠들에게 아버지 없이 자란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자녀는 씩씩한 당신이 있어서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자라 멋진 성인이 될 거예요. 그러니 두려워 말고 용기를 내서 앞으로 한 걸음씩 걸어 나가세요.”
간혹 엄마나 아빠를 잃은 자녀들이 나이에 비해 일찍 철이 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일찍 철이 든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혹 상황이 나쁘더라도 절망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무언가를 성취해 낼 때 얻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일찍 철이 든다면 그건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