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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Feb 20. 2021

모자란 오십의 탁월한 시작   

  

나는 1972년에 태어나 2021년에 쉰 살이 되었다.      

마흔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는 나이 ‘불혹’이라 배웠는데, 사실 나는 흔들림 없는 40대를 살지 못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흔들림으로 머뭇거렸고,  흔들리며 걸었다. 나는 흔들리며 피어났고, 나는 흔들리며 하루, 한 달, 일 년을 살았으며 결국 흔들리는 40대를 보낸 후 어느 날 나이 오십이 되었다.    

  

마흔이 불혹이라면 오십은 지천명 (知天命)이란다.

공자는 쉰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 하여 논어에서는 나이 오십을 지천명이라고 말했다.      


지천명이라....

나는 불혹의 사십 대를 살아 내지 못했으니 나이 오십이 되었다 한들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지천명이 되었을 리 없다. 10년 동안 마흔이 붙은 나이를 살았어도 불혹이 된 적이 없고, 오십이 되어도 지천명과는 거리가 머니 어쩌면 나는 네버랜드에 사는 피터팬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 마술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좋게 말하면 ‘순수한 오십의 어른이’이고, 까놓고 말하면 ‘나이 값 못하는 쉰 살 아줌마’다.      


지천명,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나이... 엄마 뱃속부터 오십 년을 살았으면 이제 자신을 향한 하늘의 뜻 정도는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됐어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도통 하늘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요?’ 라면서 어린아이처럼 하늘을 향해 징징거린다.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내가 품어야 할 가족과 친구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순간들이 비일비재하다. 때론 내가 품어 키우고 싶은 내 마음과 의지가 무엇인지도 몰라 ‘야! 네가 원하는 게 뭐야?’라고 자문하곤 한다. 어쩌면 오십은 적당히 알고 적당히 모르는 나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십이 된 나는 적당히 아는 척을 하고 적당히 모르는 척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십이 하늘의 뜻이나 인생을 안다고 말하기엔 모자란 나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십이 되니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지는 것들이 있고, 알려고 애쓰지 않았지만 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의 ‘응, 괜찮아’라는 대답 속에 말이 되지 못한 ‘괜찮지 않은 마음’이 헤아려져서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미 지나온 시간은 그냥 지나온 것이라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곱씹는 후회를 씁쓸하게 삼킨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때로는 목이 멘다. 젖 먹던 힘을 다해 애를 써도 실패하고 좌절할 수 있음을 안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애잔한 눈빛과 마음이 알아지고, 내가 옳다고 확신하던 것들이 틀릴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가장 확실히 깨닫게 되는 것은 ‘아,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라는 사실이다. 오십 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왔지만, 오십의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이 되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오십이 된 것은 결코 자랑할 만한 성장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그리 열심히 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물을 벗어날 용기가 모자랐거나, 나의 손 뼘 안에 들어오는 것만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삶을 편식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모자라고 미숙한 오십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나의 모자란 오십’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이 많은 오십이어서 나는 여전히 알고 싶은 것이 많고, 내가 나이 오십이 되도록 미처 알지 못했던 낯선 것들이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과거의 내가 보아온 세상이 아니라, 전에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과 알지 못했던 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무지는 내가 새롭게 알아가는 세상과 그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을 향해 아이의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나는 비로소 타인이 궁금해졌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싶어 졌다. 내가 타인의 말을 듣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알던 세상을 서로의 세상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어릴 때와는 달리 쉰 살의 나를 가르치는 이들은 대부분 나보다 어리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가진 재능과 지식을 경이롭게 여기며 그들을 기꺼이 나의 스승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스승일 때보다 내가 누군가의 학생일 때 마음이 더 가볍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나를 더 가볍고 자유롭게 만드는 날개가 된다. 힘을 빼고 가볍게 하루를 걷는 것! 이것이 내가 쉰 살의 나에게 원하는 발걸음이다.  

    

나는 낯선 것들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를 내고, 익숙한 세상에 머물고 싶은 안이함을 뿌리치고 모험심을 끄집어낸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나는 갓 한글을 배우는 아이의 책 읽기처럼 더듬거리고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나는 전보다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탐구심으로 반짝인다. 때론 더디기만 한 배움과 성장이 부끄러워 나이 탓을 할 때도 있지만 이전까지 내가 모르던 것을 하나 둘 알아갈 때, 부자연스러운 것들이 조금씩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 나는 희열을 느낀다. 나의 외모에 주름살과 흰머리를 만든 세월이 내면의 호기심을 겪지 못했으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열정을 시들게 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나는 묘한 승리감을 느낀다.      


오십의 근육과 관절은 스무 살보다 유연하지 않지만, 나는 스무 살보다 유연한 관대함으로 오십의 더딤을 용납하고 무지함을 배움으로 전환시키고 싶어 졌다.  오십이 된 나의 탁월함은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라는 무지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나는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의 세상을 들여다보며 나의 교만함이 바벨탑처럼 쌓이는 것을 멈출 수 있다. 무지에 대한 인식은 배움에 대한 열망이 되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상상력이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나로 하여금 모르는 세상을 향한 탐험가가 되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내가 살고 싶은 오십의 청춘이다.      


나는 내가 범한 실수와 내가 겪어야 했던 불행을 돌이키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과거를 바꿈으로 다른 현재를 살고 싶지는 않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원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 아니라, 현재를 용납하고 배워가는 용기이며 미래를 만들어 가는 모험심이다. 그리고 그 용기와 모험심으로 숨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탁월한 청춘을 살아가고 싶다.      


나는 지천명이 되지 못한 나의 모자란 오십의 가능성을 사랑하기로 했다. 무언가를 더 담을 수 있는 병은 모자라게 덜 채워진 병이다. 덜떨어진 나의 모자란 오십에 나는 무엇을 더 담게 될지 기대가 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모자란 오십이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지는지 기록하고 싶어졌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한다.”
 - 사무엘 울만의 ‘청춘’ 中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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