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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Oct 14. 2022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엄마! 

이번 추석에도 엄마에게 가는 길목엔 코스모스가 어서 오라는 듯 갈바람에 흔들리며 엄마 대신 우리를 맞아주네요. 

그리운 엄마의 추석 음식도 없이 고향의 가을 향기를 맡아 온지 벌써 30년이 지났는데 

저는 여전히 “엄마”를 3번쯤 부를 때면 명치끝부터 목이 메어오고 눈물이 차올라요. 

91년 뜨거운 여름, 엄마를 차가운 땅에 묻고 돌아와 엄마의 물건들을 태우던 날 

‘걱정 마. 엄마! 엄마 없이도 나 잘 살아 낼 테니 내 걱정 말고 아빠 옆에서 편히 쉬어’라고 말했었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 후 저는 한동안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매일 먹고 자고 웃으면서 아무 일 없는 듯 하루를 살아냈지만 마치 깨어나지 못하는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았고, 엘리스처럼 이상한 나라의 꿈을 벗어날 수 있는 어딘지 모를 출구를 찾아 헤매는 기분이었어요. 

친구들의 안타까운 위로에도 정작 나 자신은 슬픈 줄도 몰랐지요.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기숙사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소리 죽인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이제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부모 없는 고아가 된 현실을 실감했어요.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처음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뼈저린 후회가 몰려오더군요. 


우유를 가득 실은 짐자전거를 끌고 우유배달을 하던 엄마를 피해 친구들 뒤로 숨어버린 12살이, 집안 형편 뻔히 알면서 집에서 가까운 국립대학에 가지 않고 내 욕심에 굳이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18살이, 엄마랑 처음 가던 서울행 버스에서 엄마가 한 입만 먹어보라며 집어주던 어묵을 “안 먹어! 엄마나 먹어!” 라며 차갑게 외면하던 19살이, 객지로 혼자 보낸 막내딸이 하염없이 걱정되었을 엄마 맘은 생각도 못하고 1달이 넘도록 집에 전화 한 번을 안 했던 20살이......

 철없는 딸이 엄마를 서운케 만들었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순간들이 한없이 후회스러웠어요.

 왜 그랬을까?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짧았는데 나는 바보 같이 그것도 모르고 엄마를 보내다니. 

엄마! 그 모든 순간들이 미안했어요. 

이상하게도 엄마의 존재는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난 후에 더 크게 느껴졌어요.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엄마의 음식이 그리울 때, 방학을 해도 돌아갈 우리 집이 없어졌을 때,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언니와 오빠의 결혼식에, 조카들이 태어날 때, 대학을 졸업할 때,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내가 결혼하고 첫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기쁘고 슬픈 모든 순간들에 엄마가 생각났고 그리웠어요. 

말이 되지 못하는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이 마음 시린 그리움으로 물드는 것을 엄마를 보내고 나서야 알았답니다.      


엄마! 

그렇다고 제가 항상 슬픔과 그리움만으로 산 것은 아니니 속상해하지 마세요. 

엄마 무덤가로 꽃이 피고 눈이 내리고 그리움이 쌓여가면서 어린 딸의 생생했던 슬픔도 낙엽처럼 힘이 빠지고 색이 바래졌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초록 잔디의 무덤 앞에서 바래 진 슬픔을 마주하게 되면 인생이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도 남은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거겠죠.    
  

엄마! 

저를 쏙 빼닮은 딸이 21살 적 내 모습이 되니 저는 오래된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이 됩니다. 

21년간 두 아이를 품어 키우면서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이 되고 나서야 저는 엄마의 언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어릴 적 엄마에게 혼날 때 듣던 말 중 “아버지 없이 자라서 저 모양이란 소리 듣지 않게 행동해라.” 는 말은 제가 제일 듣기 싫어하던 말이었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게 제 탓도 아닌데 엄마의 그 말은 아버지의 부재를 한 번 더 확인시켰고, 저로 하여금 자상한 아버지를 둔 친구들을 부러워하게 만들었거든요. 

그땐 아빠의 부재를 재확인시키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원망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들었던 그 시절의 나보다 아버지의 부재를 자식의 마음에 되새기셔야 했던 엄마의 마음이 더 아프셨을 것을 깨닫습니다.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명절이면 주변 친척들을 챙기시던 엄마를 향해 “맨날 왜 우리가 먼저 챙기는데. 우리 집에 할머니가 계시니 그분들이 우리 집을 먼저 챙겨야 맞는 거라”라고 옳고 그름을 따지던 딸은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란다.” 말하시던 엄마를 기억하며 엄마보다 가진 게 많은데도 엄마만큼 주변 사람들을 챙기지 못하고 사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 시절 엄마가 제게 보여주신 수많은 몸짓과 언어들을 통해 결국 내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못 배우고 가난한 엄마여서 더 많은 것을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래도 잘 자라서 부디 네 삶을 잘 살아내렴. 고맙다. 사랑한다. 우리 딸.”이었음을 저는 엄마의 나이가 되고서야 겨우 알아듣기 시작합니다. 

엄마의 언어들을 너무 늦게 이해해서 미안해요.      


엄마! 

늦었지만 엄마가 우리 곁에 계셨을 때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을 꼭 전하고 싶어요. 

엄마는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자신이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될까 걱정하셨지만 저는 제가 엄마의 딸인 것이 진정 자랑스럽습니다. 

단 한 개의 졸업장도, 남편도, 가진 돈도 없이 가난했던 엄마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자라며 저희는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땀 흘러 수고하며 성실하게 사는 법을 배웠고, 덕분에 배움이 한이셨던 엄마의 다섯 자녀는 모두 대학 졸업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우리 집을 찾아온 누구에게나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던 엄마에게서 사람을 품는 법을 배웠고, 할머니를 등에 업고 새벽기도를 가시던 엄마에게서 사람을 섬기는 법을 배웠으며, 고되게 살았어도 노래하고 춤출 줄 아는 흥을 가진 엄마에게서 유쾌하게 웃는 법을 배웠습니다. 

힘든 순간에 절망하기보다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던 엄마를 보며 인내를 배웠고, 역경에 강해졌으며, 쉽게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엄마와 함께 한 20년 동안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배웠어요. 

엄마가 생각하신 것 이상으로 엄마는 제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고, 저는 당신의 딸이어서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하나님 제게 주신 가장 사랑스러운 보석이라면 

엄마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가장 귀한 보물이세요. 

엄마는 저의 깊고 강한 뿌리이며 제 자부심이고 긍지입니다.      


엄마! 

저는 살면서 자주 제게 이렇게 묻곤 해요. 

“오늘 나는 울 엄마의 반짝반짝 빛나는 딸이었나?” 

“오늘 나는 울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었나?” 

이 물음에 제가 “YES” 로 대답할 수 있는 하루를 살았다면 엄마도 저도 충분히 행복하겠지요. 

그런 하루가 더 많이 쌓이는 인생을 살도록 노력할게요,      

엄마! 

엄마, 사랑합니다.     
 

- 엄마가 너무나 그리운 막내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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