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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Nov 23. 2022

시아버지와 나

유일한 내 편이었던 분을 추억하며

아버님, 아버님이랑 저는 그 댁에서 동지였잖아요. 시어머니에게 혼나는 동지.

시어머니가  때로 저한테 괜한 화를 쏟아내고  전화를  끊어버리면 바로 전화하셔서 대신 사과하곤 하셨지요.

"얘, 내가 미안하다. 저 할망구 괴팍하니 니가 참아라. 내가 대신 사과 하마. **(남편)에게는 암말 말고."

아버지는 어머님보다는 현명한 분이셨어요. 며느리를 달달 괴롭히면 며느리의 억울함과 분노는 내 아들에게 향하기 마련인 걸 알고 계셨으니까요. 저에게 하는 사과는 당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랑이었단 걸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 아버지의 전화도 그다지 탐탁지 않았어요. 그땐 아버지가  말씀하신 '괴팍한   할망구'를  군기 잡지 못하는 아버지가 초라해 보이기도 했어요. 당신의  와이프 하나 어쩌지 못하고 뒤에서 사과하는 모습이 비겁해 보였지요. 저희 집 안 분위기랑은 너무 달라서였을 거예요. 저희 아버지는 가족들을 휘어잡으시고 군림하셔서 그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 가지 교육은 철저했어요. 당신 자식, 아내는 잡을지언정 남은 건드리지 않으셨어요.  당연히 우리 엄마도 며느리에게 당하면 당했지 시집살이시킬 생각은 추호도 못하게 만들었지요.

그런 집 안에서 자란 제가 본 남편의 집 안 분위기는 생소하고 이상했어요.


그런데 가족마다 사연이 있고 역사가 다르니 어쩌겠어요.   아버지는 어쨌든 늘 '참는 사람'이고 '을'이었어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아버지도 섭섭하게 한 부분, 잘못한 부분이 있겠지만 아시죠, 저는 아버지 편이었어요. 아버지가 제 편이었듯이.


어쨌든 아버지, 저희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저도 예뻐해 주셨고 또 저희 아이들도 무척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가 점점 어두워지셨지만 남편이 학회로 집에 없거나 언제나 바빴던 시절, 거의 매일 전화를 해서 저에게 별일 없냐 안부를 물어주시고 아이들과 통화를  하셨지요. 매년 연말이면 저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크리스마스 카드 겸 연하장을 보내셨잖아요. 상품권도 넣어주시고요. 그 많고 많은 손주들 중에 저희 딸과 아들을 특별히 신경 써주시고 걱정해 주셨지요. 특히 남편을 빼닮은 딸아이를 엄청 자랑스러워하셨지요. 아이들은 지금도 아버지가 주신 카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아파서 입원이나 수술이라도 하면 마치 저의 직업이 간병인인 것처럼 여기는 시누들이나 어머니 사이에서 항상 '바쁜데 오게 해서 미안하다. 어서 가봐라. 애들 기다리겠다'라고 말씀해주신 분은 아버지가 유일하셨어요.

지금 같으면 의무로 삼진 않았을 텐데, 그때 30대에  전 너무 어려웠어요. 싫어도 싫다고 말 못 하고 감내해야 했어요. 남편은 뭐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ㅠㅠ

아버지가 제 걱정을 하시면 누워있던 어머니는 "아니, 얘가 당연한 일 하는 건데  뭐가 미안해!?"라고 내뱉으셨어요. 어머니 욕하려던  글은 아닌데 어머니를 빼면 아버지와 제가 동지가 될 일은 없어서겠지요.


또 제사 때 저희 집에 오셔서 제사 지내고 식사하실 때 쿠키가 귀신같이 맘 약한 아버지를 공략하며 아버지 다리에 매달려 음식 좀 나눠먹자고 조르면 화내시기는커녕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아이고 미안해서 도저히 못 먹겠다." 하셨죠. 그러면 남편이 얼른 쿠키를 안아 자기 의자에 앉혀서 정신없는 저 몰래 고기를 잔뜩 먹이고요. (그래서 지금 쿠키 건강이 안 좋아요... 아 심각하진 않아요)

어머니는 앙칼진 목소리로 "개새끼 좀 치우라" 하시는데 참 비교됐지요. (어머니 얘기가  자꾸 나오네요. 부부는 실과 바늘이라 어쩔 수  없...)

제사를 마치고 아침만 드시면 집에 가자고 어머닐 독촉하시고  항상 저에게 고생했다 수고했다 애썼다~해주셨어요. 제가 이런저런 수술을 했을 때도 아버지는 동서네와 더불어  봉투 들고 문병까지 와주신 유일한 분이셨어요.


 그러다 아버님 건강이 나빠지시고 제사 때만 뵙게 됐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건강하셨잖아요. 결국 청력을 거의 잃었지만  노트와 펜을 갖고 다니시며 다니실 곳은 정정하게 다니셨지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아버지의  그 긴 하루하루는 어떤 나날이었을까요.  그땐 제가 당신의 아들과 아이들과 씨름할 일이 많아 정말 바빴고 힘든 시기였어요. 아버지가 본격적으로 편찮기 시작하셨던 19년... 남편이 너무 보기 싫어서 아버님도 거의 뵈러 가질 않은 것 잘못했어요 ㅠㅠ. (돌아보면 아버진 아무 잘못이 없으셨는데 그게 젤 가슴이 아파요.)

그러다 코로나가 왔고 점점 더 못 뵙게 되고, 결국 넘어지셔서 위독한 상태까지 되셨지요.

그래도 고관절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하시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우리 집 제사에 오셔서 저희들 제사 지내는 것도 보시고 크림 이를 보시곤 점잖고 이쁘다고 칭찬도 해주셨잖아요. 옆에서 짖어대는 쿠키에겐 고양이 좀 닮으라고 조언도 주시고요.


하지만 아버지,

현대판 양로원이라는 요양 병원에 모시기까지 3~4년간 증세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할 때마다 고생하는 남편의 고뇌와 고통을 보면서 솔직히 아버님을 많이 원망했던 적도 있었어요.

시아버지보다 남편이 제게 소중하잖아요. 애들과 쿠키 크림이의 아빠이기도 하고요. 그건 이해하시죠.

 평소엔 목소리 높여 깃대 들던 잘난 시누님들이 아버지 일엔 뒤로 빠지고, 동생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로 지근거리에서 아버지의 입퇴원과 자잘한 시중을 도맡아 하는 게 너무 속상했어요. 누나들도 도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의무는 아닌 것처럼 보였어요. 일단 자기일 자기 가정 돌보고 남는 시간에 도와주는 정도. 저희 집은 전적으로 딸들의 몫이고 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남자들은 먹고 사느라 바쁘잖아요.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친정 부모님을 위해선 일을 줄이거나 잠시 쉴 수 도 있잖아요. 아이들 일이었다면 시누들도 일을 그만두기라도 했겠지만, 연세 많은 아버지일이니 장남에게 옴팡 뒤집어 씌우는 것 같이 느껴졌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힘든 남편 위로해주기,  같이 한숨 쉬기, 자기 형제들 말만 앞서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대신 뒷담화해주기 정도 밖엔 없었어요.


요양병원에서 상태가 안 좋아져 다시 큰 병원으로, 결국 의식도 없이 계셨지요. 중환자실로 옮겨져 인공호흡기를 끼우고 연명치료를 시작하고 시누들은 의미 없다 했지만 남편은 아버지를 놓지 못했어요. 최종 결정은 장남인 남편이었고 저는 병원엔 가볼 수 없으니 남편을 통해 아버지 상태만  확인했지요.

그런데 의식 없이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던 아버지가 자가 호흡이 돌아와 일반 병실로 옮기셨고

몇 달은 버티실 줄 알았어요.  물론 의식이 없는 의미 없는 한 발자국의 회복. 그런 모습으로 버티는 것이 과연 인간이 존엄을 지키며 사는 건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지만  복잡한 모든 감정은 임종하시기 전  아버지를 뵙고는 다 사라졌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  항상 임종을 대기 중이던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자기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위독해져서 다시 인공호흡기를 끼우고 승압제를 투여 중인데 가족회의 끝에 연명치료를 중단하기로 했거든'  그간 남편의 고생만 봐온 나로선 그 결정을 존중하고 힘을 실어주는 수 밖엔 없었다.

어차피 의식 없이 누워 계시지만 마지막으로 연명치료 중단 전에 다 같이 인사를 드리기로 하고 병원 로비에 모두가 모였다. 시누들 부부, 동서네 부부, 우리 부부와 각각 집에서 올 수 있는 아이들 세명. 코로나로  출입 금지가 원칙이지만 임종 전이라 예외를 두고 절차를 밟아 딱  두 명씩 병실에 올라갈 수 있었다.

두 시간을 기다려 올라갔다. 장남이 남편인 죄로 꼴찌로 가게 된 나는 허리도 아프고 기다림에 지친 상태였다. 아버질 봐도 그다지 슬플 것 같지 않았다. 담담하게 남편을 따라 병실로 향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부터 묘한 공기에 압도되었다. 갑자기 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았다. 무서웠다. 의식 없이 마른 모습에 인공호흡기를 달고 엄청난 기계장치에 주렁주렁 온몸이 온갖 수액 줄이 휘감아져 있을 텐데, 괜히 뵜다가 트라우마로 남는 건 아닌지 겁이 났다.

하지만 뒤돌아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가슴 두근거리며  병실로 들어서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의식 없이 비쩍 마른 모습은 마치 미라 같았지만 눈을 뜨고 입을 벌리고 계셔서 마치 나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아이들에게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추억과 기억들이 몇 달 만에 아버지를 보는 그 순간, 와르르 쏟아졌다. 퉁퉁 부은 손을 잡아보았다. 혈류가 원활하게 돌지 않아설까 방 안은 따스한데 손은 차가웠다.

그리고 그 손을 잡는 순간,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남편이 왜 그렇게 아버지를 놓지 못했는지 그냥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깨달음에 대한 묘사는 하기가 어렵다. 그냥 아버지니까!


연세도 많으시고 너무 고생 중이시라 진작에 연명치료를 중단해서 편히 보내드리자는 시누들의 입장  쪽이었던 내가 눈물을 흘릴 줄은 나도 몰랐다.

아버지의 극진한 편애와 사랑을 받은 남편은 같은 남자로서 아버지의 인생을 돌아보고 애증과 애정으로 마침내 모든 걸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고 수없이 많은 나날을 고뇌했을 것이다. 냉철한 판단으로 먹고사는 남편도 아버지 일에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어린 자식일 뿐이었다. 담당 교수님들의 조언과 시누들의 강력한 권고로 연명치료를 끊고 마침내 보내드리기로 한 후에도 그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한참을 아버지 손을 잡고 속으로 인사드렸다.

"아버지, 저희 아이들 예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 아들 때문이었어도 항상 제 편 들어주시고 따뜻하게 말씀해주신 것 감사해요. 하늘에서도 저희들 항상 지켜봐 주세요. 제가 정성껏 아버지 제사  잘 모실게요.~~ 편히 쉬시길."


마침내 시댁의 유일한 내 편은 그렇게 떠나셨다.


ps 남편은 아버님의 임종을 위해 집에도 3일간 들어오지 않고 마침내 혼자서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장례와 발인, 초제까지 모든 과정에 최선을 다했고, 나는 잔정 없고 냉정한 그가 이 정도로 효자인 줄은 이번에 알았다. 힘든 시간을 많이 보내셨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인생은 행복했고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늘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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