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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Nov 02. 2021

구사일생 크림이

ㅡ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12년 3월에 우리 집에  와서  9년째 같이 사는 귀염둥이 쿠키는 지금껏 두 번 혼났다. 3~4개월 때 제 몸집만 한 하이힐 굽을 물고 가다가  또 한 번은 식탁 음식에 입 댔다가. 지금 만으로 9살인데 이 정도면 착한 강아지 콘테스트에서 우승후보에 오를 만 하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강아지 버전인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나 '개는 훌륭하다'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주인을 물거나 집안 전체를 난장판을 만들거나 지나치게 짖거나 하는 다양한 말썽쟁이 개들이 나온다.

보면서도 믿을 수없는 강아지들의 문제행동을 쿠키랑 같이 시청하면서 단 한 번도 속 썩인 일 없는 상냥한 내 새끼에게 폭풍 뽀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크림이는 조금 다르다. 순하고 착하기로는 쿠키 뺨치지만 고양이다 보니 호기심이 많고 아기처럼 뭐든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이 있다. 오죽하면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까지 있을까.

흔들리거나 움직이는 모든 것에 반응하느라 심심할 틈이 없는 크림이가 결국  큰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호기심 천재 크림이


10월의 마지막 날, 날씨는 화창하고 따스해서 집에 머물러있기가 햇볕에게 너무 미안한 날이었다.

쿠키와 산책이라도 나가야겠다 싶어서 옷을 고르는데 눈치 빠른 쿠키는 아양을 떨고 코빼기도 안보이던 크림이는 뭔가를 입에 물고 나타났다. 어디다 숨겨놓는지 예전부터 갖고 놀던 납작한 고무밴드. 보통 전선줄을 감아서 고정하는데 쓰는 납작하고 두꺼운 고무밴드다. 그 고무밴드를 갖고 길고 가는 앞다리로 툭툭치고 입에 물었다가 또 던져서 손으로 잡았다가 얼마나 잘 노는지 귀여워서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날은 가만히 보니 밴드 끝이 이빨 자국으로 뜯겨있고 꽤 오래 갖고 놀았으니 이젠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림아 이제 그만 버리자, 엄마 주세요." 하고 뺏으려 하니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치뜨더니 손으로 치며 놀던 고무밴드를 입에 물고 잽싸게 도망쳤다. 하는 수 없이 캔닢(*고양이 마약이라 부르는 가루) 묻은 딸기 쿠션을 흔들며 불렀더니 밴드를 잠깐 놓고 오길래 이때다  싶어 집으려는 찰나 날쌘 순이 크림이가 또다시 밴드를 낚아채고  나는 크림이를 안았다.


크림이는 순간 입에 문 밴드를 질겅질겅 씹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황한 나머지 크림이 입을 벌려  손을 넣으려 했다. 그러자 크림이는 입을 꽉 다물더니  그 긴 납작 밴드를 꿀꺽 삼키고 말았다!! 세상에!! 머리가 하얘졌다. 충격도 잠시 별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똥으로 나오겠지?


크림이를 살펴보니  평안해 보였다. 그래도 좌불안석, 내가 잘못되고 말지 크림이 잘못되는 날엔 나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일단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납작이 고무밴드가 뭔지 잘 모르는 남편은 병원에 전화를 해보라 한다. 맞다 병원!! 쿠키 단골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삼킨 지 얼마 안 됐으면 구토하는 약을 써보면 좋은데 강아지에겐 95프로 효과가 있지만 고양이는 30프로라 보통 내시경으로 꺼낸다는 것이다. 내. 시. 경이라니... 일이 커져만 갔다. 만에 하나라도 변으로 나올 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던 것은 과연 수면내시경의 비용은 또 얼마나 어마어마할까... 하는 두려움도 조금은 있었음을 고백한다.(동물 의료보험이 정말 절실하다)


그러는 중  딸아이가 왔다. 구세주가 등장한 느낌이었다. 크림이와 각별한 딸에게 큰일났다며 사연을말하자 아이는 일단  나에게 크게 화를 냈다.

"츄르주면서 꼬셔서 빼앗았음 좋았잖아!!." 그 말이 옳은 것 같아 할 말이 없었다. 급히  인터넷을  뒤지더니 병원 가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나는 또 그 사이 고양이 두 마리를 애지중지 키우는 지인에게 전화를 했는데 역시 서둘러 병원에 가보란 얘기를 들었다.

지체할 수없었다. 크림이를 찾으니 그 사이 밥을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내시경은 빈속에 해야 하는데 ㅠㅠ~~ 밥그릇을 뺏고 이동장에 넣어 병원으로 향했다. 딸아이와 둘이 아무리  인터넷 검색을 해도 집 근처  고양이 전문병원이 나오지 않아  우선 쿠키 병원으로 달려갔다.

무슨 상황인지 심기불편한 크림이

그런데 아까 전화했던 선생님은 병원엔 고양이 전용 구토제가 없고 여기서  하려면 혈액검사 후 수면내시경 하고 (그런데 밥을 먹어서 실패 확률도 있고) 수액도 맞아야 하고 몇 시간이 걸리게 되는데 비용은 90만원이라고 했다.

헉! 구, 구십만 원....

잠시 아연실색한 모습을 보았는지  삼킨 지 얼마 안 됐으니 고양이 구토제가 있는, 냥이만을 위한 전문병원을 소개해주셨다. 고맙긴 한데 아까 전화했을 때 알려주셨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또다시 이동.  

일요일이라 차도 안 막히고 병원도 한가했다.


For Cats Only라는 표지판이 세워진  규모 있는 고양이 전문병원을 보자 왠지 안심이 됐다.

이리 저리 실려 다니면서도 크림이는 야옹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가슴은 방망이질 치고 있겠지.  가엾은 우리  크림이. 내가 잘못해  놓고 비용 듣고 놀란 것이 내심 미안했다. 이곳에서도 내시경을 하라면 얼마가 들던 해줘야지 결심했다. 의사 말대로  만에 하나 위로 내려가다 걸리거나 장에 가다 막혀 폐색이라도 오면 배를 갈라야 할 수도 있다는데, 불안에 떨며  변으로 나오는 요행을 바라느니 반드시 꺼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엑스레이와 초음파를 해보자 했다.


얼마 후, 선생님이 보여준  엑스레이에는 크림이가 삼킨 납작 밴드와 그 위로 쌓인 사료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초음파에선 희미하게 보였다.  크림이의 정직한 뱃속이 너무 귀여워 그 와중에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은 뱃속에 사료가 가득이라 어차피 내시경은  안되니 일단 구토제를  써보자고 했다.

진료실 뒤 처치실에 붙들려간 크림이가 걱정되고 보고 싶어서 크림이를 잠시 보겠다 했더니 발톱을 깎는 중이란다. 낯선 이에게 안겨 발톱깎는 풀죽은 크림이의 모습이 상상이 되니 짠했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밥 먹다가 이동장에 갇혀  이 병원 저 병원 끌려다니고 억지로 눕혀져 엑스레이와  초음파까지 찍혔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까. 크림이에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을 것이다.


구토유발제를 주사하고 지켜보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 걸릴 수 있다 해서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한산하고 평화롭고 조용했다.

부디 구토제로 끝내기를 기다리며 모든 상황을 공유하는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크림이 얘기를  전하며  폭풍 수다를 떨고 있는데  5분이나 지났을까? 딸아이  전화가 와서 얼른 들어가 봤더니 세상에나!!

정말 최고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 뺏기려고 꿀떡 삼킨 그 납작 밴드가 그대로  나와있었다. 고  이쁜 것이 이렇게나 빨리 토해내다니! 성당에 냉담 중인  내 입에서 "알렐루야 ~~ 하느님 진짜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 애기가 삼킨 납작 밴드의 정체 ㅠ

크림아! 이 세상 고양이 중 젤 이쁜 크림아!

제발 아무거나 먹지 말자~~ 부탁이다!

영문을 모르고 기분 나쁜 크림이,팔에 감은 보라색 지혈밴드가 눈에 띤다.

P.S 1  뒤늦게 알게된 사실(by  수의사 지인)

냥이가 이물질을 삼켰을때 사실 엑스레이만 찍으면 된다고 하네요.  크림이 상황으론 초음파까지는 필요없대요. 그리고  고양이 *체토제(토하게 하는 주사, 진정제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구토를 유발한다고 합니다) 가 있는 병원가셔서 *체토제를 쓰세요~(보통 삼킨 후 두시간 이내 가능)

여하튼, 나중에 검색해보니 고양이는 뭐든 물고 삼키는 선수더군요 ㅠ 이런 일로 내시경했다는 사연이 너무 많아 놀랐습니다.


P.S 2   비용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이번일로 병원비는 29만원 나왔고 초음파를 안했다면 10만원이상은 저렴했을 것 같네요~

집으로 돌아와 긴장이 풀렸는 지 세상모르고 자는 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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