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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Dec 10. 2021

시집살이 어디까지 해봤니 제5편

그럼에도 그녀들이 잘 사는 이유

며느리의 대나무 숲 멤버들은 이 모임을 만든 상담사 언니 빼곤 아무도 이혼하지 않았다. 혹독한 시집살이에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

 "어떻게 그런 대접을 받고 살아요? 자존심도 없나요?." 이 질문에 대한 공통적인 답은 의외일 수 있으나 사실이다.


"오히려 자존감도 높고 자존심이 있어서 이혼할 필요까지 못 느꼈고요, 무엇보다 남편이 내편이라 못했어요."

"남편이 내 편까진 아니어도 중립을 지켜줘서 내가 싸워나가기로 했어요. 이혼은 시댁과의 갈등이 끝난 후 내 감정을 보고 결정할 일이지 시집 식구들에게 말려 들어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외부와의 전쟁은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이 원리를 모르고 아들이 하루라도 빨리 갈라서길 원하며 구박하는 시어머니의 어리석은 계산착오는 웃픈 일이다. 적어도 사랑해서 결혼한 남편들은 와이프를 겉만 보고 판단하는 내 집 식구들이 틀린 것을 알기에, 속까지 보고 판단한 본인이 맞는 것을 알기에, 또한 선택에 대한 책임감으로 아내의 편에 선다. 와이프는 남편이 나를 지지하는데 굳이 이혼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남편이 내 편 아닌 상황에서 시집과만 잘 지낼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살을 에이는 추운 바람에 맞서 견디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엾게  '존버'하는 것이다.  시집과 거리를 두고 나랑 알콩달콩 사는 남편은 있어도 아들과 등 돌린 며느리와 잘 지낼 수 있는 시부모는 없다. 왜냐하면 팔은 안으로 굽기 때문이다. 내 아들이 사랑해도 못마땅한 판에 내 아들이 싫다는 며느리를 감싸 안아주는 건 본능에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생활의 핵심은 무엇일까? 부부 관계와 아이들이다. 시집살이도 길어야 40대까지다. 나는 30대 후반에 끝냈지만 결국 시간 싸움이다.

한창 시집살이에 시달릴 때, 우아하게 나이 드신 60대 이모뻘 되는 분이 웃으며 한 마디 하셨었다.

"감이씨,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감이씨 편이에요. 애들은 크고 나는 점점 힘이 생겨요. 시어머니는 탓하지 말아요. 그건 그분들의 업이고 그 대가는 치러질 겁니다. 감이씨는 그냥 가족 무탈한 것에 감사하며 감이씨 인생을 즐겁게 살아요. 그럴수록 남편한테 잘하시고요."

시간이 내 편이라는 말이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잘하지는 못했다. 여우가 아닌 곰과인 나는 말도 안 되는 시집살이에 대해 분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남편에게 시어머니의 무례함에 대해 따져 물었다.

"원래 그러신 분이야. 우리한테는 더해."

어머니의 지난한 인생이 아픈 남편은 내 편에 설 수도, 어머니편에 설 수도 없는 애매한 스탠스를 취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나는 당신 엄마의 자식이 아닌데! 남편은 심사숙고 후  위로차 건넨 말이었겠지만  나에겐 오히려 상처였다.

어쨌든 30대 후반에 남편 일로 온 가족이 미국을 가면서 나의 시집살이는 끝이 났다. 물리적인 거리가 생겨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그동안도 참았다기보다는 시어머니의 막말 중 해석이 안 되는 어안이 벙벙한 대사가 많아서 친구들 언니들에게 이야기하며 그 의중을 헤아려보곤 했다. 왜냐면 전혀 TPO에 안 맞는 어이없는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시어머니의 고생스런 뒤안길,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힘든 시누들의 모습과 상대적으로 육아에 집중하며 금쪽같은 내 아들(남편)의  지지를 받으며 편해보이는 내 모습이  시집 식구들에겐 열등감과 자괴감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곤 했다. 문에 그동안  사실 나는 내 시집 살이의  원인이 삶의 방식이 너무  다른 데서 오는 여자들끼리의  '이질감'이나 '열등감''질투'인 것 같아서 툭툭 털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미국에 오기 직전 시어머니는 10여 년 시집살이 중 정말 차마 사람이 사람에게 대놓고 해서는 안될 드라마 대사를  '한마디' 날렸다.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 나올만한 대사.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정말 들은 내가 부끄러워지는 이야기. 하지만 그  한마디로 나는  마음이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은  남편이 좀 강하게, 나대신 나를 지켜주길 바랬지만  그따위 기대는 버리고 이젠 내가 나를 방어하기로 결심했다.  남편과 이혼을 불사하고서라도 더 이상 이렇게는 살지 않기로,  이제 다시는 그런 말을 듣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이다.

일단  시댁과 연락을 끊었다. 미국에 있을 때 내내,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시어머니가 디스크 수술을 핑계로 다시 연락할 때까지 년간.

만일 남편이 나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다그치고 괴롭혔다면 지금의 가정생활은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은 나의 처사에 대해 응원을 하진 않았지만 방관자로 행동했다. 남편이 어머니에게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부끄럽다고 소리치고 같이 인연을 끊어 주길 바랬지만 유약한 그에겐 방관과 중립이  최선임을 알기에 돌아보면 어쨌든 남편의 중립은 고마운 일이다. 그는 심정적으론  아내인 내 편이었다고 생각된다.(아닌가?...)

내가 단단하게 맘먹고 실천한 이후 놀랍게도 전세가 역전이 된 건지 시간이 내 편이 된 건지는 몰라도 시집살이 스트레스는 미국 생활 이후 지금껏 제로다. 어머니는 십수년 전 미국 가기전에 내뱉은 막말에 대한 가를 치뤄야 했고 그 일은 우리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사람 바뀌는 일 없으니 아직도 툭툭 던지는 말씀은 여전하시지만 이젠 나도 그러려니 하는 여유와 때때로 어머니말에  따박따박 대꾸하는 맷집도 생겼다. 또한 시어머니로서가 아닌 '남편의 어머니'로서의 장점과 배울점까지도 보게 되었다. 어머니 역시 며느리에 대한 욕심과 못마땅함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예전에 비하면 천지개벽이 일어났나 싶을 정도로  많이 바뀌셨다. 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변하자 시누들은 저절로 정리가 됐다.

며느리의 대나무 숲 멤버의 어느 남편은 호된 시집살이를 막아주진 못했지만 '밤마다 고맙다, 사랑한다, 나는 네 편'이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시어머니 아니었으면 남편에게 이런 사랑 못 받았을 거라며 오히려 못되게 굴던  시어머니에게 감사한 회원도 있다.  어려울 때 아군 적군이 제대로 보이듯이 고부 갈등 속에 남편이 선 자리도 그때 비로소 보이게 된다. 내 편인지 남의 편인지.

또한 며느리에게 아들을 '빼앗기고 아파할 수 밖에 없는' 외롭고 가여운 상황의 시어머니 모습도 보인다. 남편이 있지만 남편의 보살핌이나 따스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 내 인생 없이 가족들의 뒷바라지에만 올인해 잘키운  아들에게 빗나간 사랑을 갈구하는 가여운 여자의 모습.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겼다 생각하고  집착하는 시어머니에겐 사랑을 주지 않은 시아버지의 책임도 반 이상이다. 시집살이의 주체가 전혀 아니었을 뿐,  너무나 쎈 시어머니에 눌려 사는  나의 시아버지는 결혼 초부터  늘 뒤에서  전화와 편지로 나를 위로해주곤 하셨는데  (어머니가 할 사과를 아버지가 대신 하기도 하셨다)어쨌든  내겐 좋은 시아버지지만 시어머니를 저리 강하고 외롭게 만들어 나같은 피해자를 만든 장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문득 든다.

어쨌든  부부 사이가 화목한 집은 두 분이 여행다니고 황혼을 즐기느라 아들 며느리에게 신경쓸 시간이 아까운 법이다. 남편들이여~부디 아내를 외롭게 하지 말지어다.



모임 2


12월 첫 날, 오랜만에 8명 모두가 모여 이른 송년회를 가졌다. 전쟁 같은 시집살이도 아득한 과거인 것 같이 느껴졌다. 벌써 5~6년 전 처음 만나 참 어색했던 사이에서 조금씩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며 나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니구나 하는 위로와 온기를 나눴었다. 그래도 남편 손 놓지 않고 잘 헤쳐온 길을 기억하며, 앞으로 우리는 멋진 시어머니가 아닌 멋진 어른이 되자고 건배를 했다. 누가 내년부턴 부부동반 모임을 하면 어떠냐는 제안도 했다. '며느리의 대나무 숲 모임'에서 '좋은 시부모 되기 모임'으로? 오, 하지만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좋은 어른이자 바람직한 시부모의 조건에 대해 생각을 나누어 보았다.

좋은 부모의 조건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라는 말이 양육으로 힘든 시절, 참 가슴에 와닿았다. 아이들 중 고등학교 때 대부분의 엄마가 그렇듯 나도 참 행복하지 않았다. 아이들 시험이 다가오면 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이들이 학업이나 친구 문제로 힘들면 내가 끙끙 앓아 누웠다. 내 인생의 반은 내 것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했기에 미련은 없지만 그렇게까지 집착할 필요가 있었을까 후회가 많다.

 집착을 하니 간섭하게 되고 나 혼자 멋대로 쏟은 열정에 대한 보답을 기대하고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내 아이들을 믿고 욕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내 삶에 집중하고 즐겁게 살게 되었다. 놀랍게도 아이들이 독립적이고 자기인생에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그때부터였다.


시부모의 자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를 위한 멋진 인생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가족 모두와 감사와 사랑을 나눈다면  그 모습 자체로  참 멋진 시부모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일 뿐이다. 누구나 부디 자식만 보지 말고 '나에게' 집중하는 쿨한 어른이 되길, 그래서 지긋지긋하고 비상식적인 '시집살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세대를 끝으로 사라지는 단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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