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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Dec 22. 2021

브라보  마이 50대 라이프

당신의 50대는 어떠신가요?

40대까지만 해도 50세 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살아있긴 하겠지만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5060은 '내 엄마'의 나이지 내게 올 나이 같지가 않았다.

수명이 늘어나건 말건 어쩌면 50 이후의 삶은 여성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일이건 취미 건 어떤 분야에도 반짝일 수 없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냥 막연히... 40만 넘어도 나는 브로콜리 머리(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하고 안경을 쓰고 안경알이 두꺼워 눈도 돌아가고 세상 아무 재미없이 그냥 살고 있겠거니~ 했던 것 같다.

8.15와 6.25까지 생생하게 겪고 영어교사까지 하셨던 외할머니는 자꾸 같은 말씀을 반복하셔서 '배운 할머니가 왜 같은 것 여러 번 물어보시냐'는 나의 타박에 '너도 나이 들어봐라'하셨었다. 겨우 걷고 기어 다니는 애들 때문에 정신이 없던 30대의 젊은 엄마는 그런 말이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그런데 엄마의 삶이란  자기 나이 먹는 건 모르고 내 아이들 크는 것만 보는 것인지, 돌아보니 40이 되고 50이 넘어버렸다. 정신줄 놓으면 언제 그때 나의 외할머니 나이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다지 남부러울게 없이 일생을 보냈던 엄마의 말씀도 생생하다. "나는 지금이 좋아,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까다로운 늬 아버지 비위 맞추고  너희를 키우는 일 두 번은 못할 것 같아."

그 말씀에 진심으로 동감한다.

사실 40이 되면서부터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생이예요... 무슨 띠예요.. 이렇게 대답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십몇이라는 나이를 입에 담기가 너무 싫었고 그 나이가 너무 많아서 끔찍했다. 물어본 사람도 기겁할 것 같았다. 지금 보면 너무 예쁘고 부러운 나이지만 말이다.

그런 내가 50이 되고 심지어 넘어버렸으니 어떻게 사냐고요?



50이 되던 해, 내 인생에는 큰 고비가 왔다. 신체적인 갱년기보다 마음의 갱년기. 가족이고 뭐고 다 등지고 제2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소망이 간절했다. 한결같이 순하면서도 우유부단한 남편은 내가 시집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아이들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방관했고 무심했다. 어떤 일에도 나서서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고 숨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주체가 나여야 했다. 나는 우아하게 살고 싶었는데, 자꾸만 드세지고 강인해졌다. 남편은 경제적인 분야만 확실하게 해결해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폭력적이라거나 다혈질이라거나 무능하다거나 하는 뚜렷한 단점 때문에 고생하는 주변인들에게 나는 호강에 겨워 지 복을 발로 차는 한심한 여편네였다. 아이들도 사정없이 내 뒤통수를 갈겼다. 기사겸 매니저 겸 방과 후 도우미 겸 에미 노릇까지 시킨 딸은 수능을 보기 좋게 망쳤다. 그만하면 됐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하고 망쳐도 속상할 판에 알고 보니 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 나만 종노릇을 한 셈이었다. 만정이 떨어졌다. 고등학생인 아들과 쿠키가 맘에 걸렸다. 그래도 궁지에 몰리니 일단 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과 아이들과 정리를 하고 그냥 나 홀로  살고 싶었다. 외국으로 떠나서 뭐든 할 참이었다. 매일 밤 혼자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었다. 그 상상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힘이었을 정도로  심리적인 변화가 컸다. 독특한 화법,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양한 내 모습에 적응했던 남편도 이번 일만큼은 심상치가 않았는지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정리하지 말고 몇 달이고 어디든 떠났다가 돌아오라고 했다.

아니, 보란 듯이 이혼하고 그간 남편 때문에 생긴 내 맘의 상처를 한 번에 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남편이 세상 못하는 것이 육아였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무엇을 기르고 가꾸는 것은 젬병이었다. (예쁘게 키워놓은 것에 대한 칭찬과 지원은 잘했다.) 다 큰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은 아직도 독립하려면 멀었다. 어디 한번 키워봐라.




과연 이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게 사주상에도 나와있을지 궁금해서 오랜만에 사주를 보러 갔다. 나는 사주 보는 걸 좋아한다.  방송작가 수습 시절 첫 프로그램이 사주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점쟁이를 섭외하기 위해 전천후로 뛰어다니고 직접 만나본 시절이 있기에 나는 사주 보는 일에 큰 두려움은 없다.

결혼 후엔 그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 믿을 만한 점집 두어 군데로 줄여놓고 주로 아이들이 궁금해 아이들 것만 보곤 했다. 결혼 이후엔 거의 처음으로 오로지 내 사주만 보러 간 것이다.

"글 안 쓰고 뭐 하고 있어?!" 날 보자마자 그분은 바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네?" (그만둔 지가 언젠데 글 타령인지 의아했다)

"당신은 50부터 봄이야. 지금까지 20년간 겨울이었다가 이제 봄이 왔다고. 그간 고생 많았어. 이제 당신 세상이니까 잘 놀아. 잘 놀고 글을 써."

본디 나는 철학관이건 무당집이건 거기서 해준 안 좋은 말은 다 까먹고 좋은 말만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 그날 내 가슴에 꽂혀 지탱해주는 말은 '50에 찾아온 봄' '고생했어' '잘 놀아'  세 가지였다.

(그 후로도 내가 으뜸으로 치는 명리학자인 내 친구의 말도 아우트라인은 저 분과 같았다. 그 친구는 스무 살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잔잔하게 30년간 나를 알고 지낸 친구라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항상 기운을 북돋는 말을 해주었다. )

그리고 내 질문에 덧붙였다.

"이혼은 못해. 절대 못해. 할 수 있는 사주도 아니고 노력해도 안된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더니 진짜 자의 반 타의 반 사주 탓에 합의점을 못 찾고 다시 살았다. 다시 살기로 하면서 글쓰기보다 골프채를 먼저 잡았다. 남편은 예전보다 가족들을 위해 섬세한 노력을 기울였고 내가 무엇을 하든 (원래도 그랬지만) 노터치였다. 결혼 후에 남편이 나를 구속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스스로 편과 아이들에게 집착하고 희로애락을 그들 속에서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물론 후회는 없다.

우스갯소리로 아이들에게 "엄마가 든 펀드 중에서 젤 손실률이 큰 펀드 두 가지가 바로 M과 S (아이들 이름 이니셜) 펀드야... 기다리면 플러스가 되는 거지?" 농담하곤 하지만 몇 번을 돌아가도 아이들 스무 살까지는 아이들을 위해 살 것이다. 대신 비난보다는 칭찬을, 조급하게 몰아치기 보다는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미덕을 갖추고 싶다. (쿠키 크림이 키우듯이..ㅠㅠ)



 단 한 번도 올 것이라고 상상해보지도 못한 50대를 맞은 나는, 그 어느 시절보다 편안하다. 어느새 성인이 된 두 아이들, 나는 아이들 끼니에 집착하지 않고 아이들의 모든  생활에 대해 예전보다 훨씬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젠 정말 방목하면서 울타리 노릇만 하고 있다.

이제 나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 많아졌다. 신기하게도 아직 브로콜리 머리를 하지도 않았고 외출 시엔 아직도 (누가 볼까 두려워) 안경 대신 렌즈를 낀다. 딸과 같이 공유한다는 핑계로 젊은 분위기의 옷과 신발을 산다.  시시콜콜 잔소리로 키운 내 딸은 이제 나에게 화장법을 가르쳐주고 싸고 기능 좋은 화장품을 건네기도 한다. 생일 선물도 아르바이트해서 번 제 돈으로 턱턱 사서 안긴다. 아직 아들은, 무뚝뚝하지만 여전히 속 깊고 착하다. 무엇보다 유학 생활을  알아서 잘하니 그보다 고마울 순 없다.

50대가 되어 친구들도 대부분 학부모 신세를 졸업하니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겨 함께 웃을 일이 많아졌다. 예전엔 애들 걱정에 한숨뿐이어서 독주를 마셔도 안 취했는데, 이젠 생맥주 한 잔에도 노래가 나왔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통해 다시 만난 친구들과도 더욱 돈독해지고, 육아의 기쁨과 고통을 나눴던 학부모들과도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었다. 요가에 흠뻑 빠져 수련을 함께하던 언니들, 친구들과도 자매의 정을 나누고, 그렇게 인연을 맺은 내 주위 사람들이 골프를 통해 얽히고 설킨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소개해 같이 어울리는 즐거움이 이렇게 큰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주름과 흰머리가 늘어가고 여성성이 사라지는 대신, 내 젊음과 맞바꿀 만한 신나는 50대가 기다리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놀라운 일은 또 있다. 내가 손가락질하던 일들, 할머니들끼리 모여 앉아 "너 그대로야, 얘. 누가 보면 결혼 안 한 노처녀인 줄..." "네가 20대 아이들의 엄마라고 누가 믿겠니." 이런 시덥잖고 부끄러운 언행을 나도 친구들과 언니들과 골프를 치다가 가끔씩 하고 있다. 아무리 '재미'로 하는 말이라도 (누군가 들으면 놀라고 불쾌한 일일텐데) 반성하고 고칠 일이다.




가끔 생각해본다. 모든 걸 뿌리치고 홀로 떠난 내 삶은 어떠했을까? 나름대로 나는 잘 헤쳐나가며 살았겠지만, 남편이, 그리고 점쟁이가 내 맘을 고쳐먹게 도와주고 나를 그냥 풀썩 주저앉게 해 줘서 고맙다.

"놀다 보면 지쳐서 글도 쓰고... 돈도 벌 거야... 고생은 끝났고 좋은 일만 남았어. 니 봄날을 즐겨"

점쟁이의 예언을 따라 나는 오늘도 노력한다.  '브라보!! 나의 50대'를 위해!!


P.S 육아로 힘든 30~40대님들께 바칩니다. 아가들은 금방 자라고 곧 내 시간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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